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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슴한 맛 은근한 멋…중고제 판소리를 아시나요”

등록 2021-07-13 17:38수정 2021-07-14 02:34

박성환 명창, 21일 중고제 ‘적벽가’ 완창 무대
박성환 명창.
박성환 명창.

“서울에서 중고제 ‘적벽가’ 완창은 이번이 처음이죠. 근데, 중고제를 아시나요?”

11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국가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이수자인 박성환 명창은 기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박 명창은 21일 저녁 7시30분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박성환 중고제 적벽가 완창’ 무대를 연다.

3대 판소리 가운데 서편제·동편제는 들어본 사람이 많겠지만, 중고제(中古制)는 낯설다. 박 명창은 “중고제는 지역적으로 동·서쪽보다 위쪽 지역인 경기·충청에서, 시기적으로는 동편제와 서편제보다 앞서 불려온 판소리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박성환 명창이 11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중고제 판소리를 설명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박성환 명창이 11일 오후 서울 관악구의 한 카페에서 중고제 판소리를 설명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중고제는 어떤 느낌의 판소리일까? 박 명창은 “의뭉스러운 판소리”라고 했다. “충청도 사람은 내색을 잘 하지 않아 속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중고제도 그렇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눈에 띄는 화려한 꾸밈도 억제한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싱겁고 밋밋하고 뻣뻣해 단조롭게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듣다 보면 은근한 속멋이 있어 쉬 질리지 않고 소리 본연의 맛을 느끼게 한다.”

‘여름 더위를 풀어주는 평양냉면의 슴슴한 맛 같냐’고 묻자, 박 명창은 “그렇다. 그 슴슴한 맛이 중고제의 멋”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서편제·동편제와의 차이는 뭘까? 박 명창은 “힘차고 강한 동편제나 애절하고 여린 서편제와 달리 중고제는 초창기 판소리의 특징인 점잖고 의젓하고 꿋꿋함이 돋보이는 소리”라고 강조했다.

현재 중고제 판소리는 일제강점기 때 나온 유성기 음반(SP)으로나 들을 수 있는 귀한 소리가 됐다. 왜 중고제는 우리 곁에서 사라졌을까? “사람들의 취향이 감정 표출이 강한 소리를 선호하는 쪽으로 변했다. 절제된 창법의 담백한 중고제가 밋밋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는 왜 중고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을까? 사실 소리꾼 30년 길을 걷고 있는 박 명창은 프랑스어를 전공했다. 입대를 앞두고 잠깐 배운 판소리에 꽂힌 게 계기가 됐다. 제대하자마자 물어물어 지리산 자락에 살던 강도근 명창을 찾아가 동편제 ‘흥보가’와 ‘적벽가’를 배우면서 판소리에 입문했다.

박성환 명창이 공연을 앞두고 서용석 고수와 함께 중고제 판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 박성환 명창 제공
박성환 명창이 공연을 앞두고 서용석 고수와 함께 중고제 판소리 연습을 하고 있다. 박성환 명창 제공

중고제 판소리는 소리꾼 길로 나선 지 10년이 지나 만났다. 일제강점기를 끝으로 단절된 줄 알았던 중고제가 정광수 명창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걸 논문에서 읽고 찾아간 때가 2000년 9월이었다.

당시 정광수 명창은 아흔살이었다. 나이가 있어 제자를 받지 않았지만, 박 명창은 ‘적벽가’에 나오는 ‘삼고초려’처럼 무작정 그를 찾아갔다. 네번째 찾아가서야 허락을 받아 마지막 제자가 됐다.

스승은 제자한테도 반말을 쓰지 않았다. “스승님은 ‘뭘 배우고 싶은가요’라고 물으셨다. 중고제 ‘적벽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스승님은 ‘철이 지나서 못 풀어 먹는 소리’라고 했다.” 오래전 판소리여서 무대에 서서 많이 부르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그는 ‘적벽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스승님은 ‘수궁가’를 배워보라고도 했다. 제가 고집을 굽히지 않자, ‘왜 자꾸 배우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대한제국 고종·순종이 총애한 이동백 명창의 ‘적벽가’가 충청도 중고제인데 제가 충청도 출신 소리꾼이라 그 소릴 꼭 배우고 싶다’고 했다. 스승님이 껄껄 웃으면서 ‘힘들고 어려운데 생색이 잘 안 나는 소리’라면서도 중고제 ‘적벽가’를 가르쳐주셨다.”

박성환 명창.
박성환 명창.

처음에는 배우기가 ‘너무너무’ 어려웠다고 했다. “동편제 ‘적벽가’를 이미 배워 어느 정도 할 줄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첫마디, 한 장단을 뗄 때마다 스승님은 설명을 해주지 않고 ‘그건 아니에요’라며 틀렸다고만 했다. 두달 뒤 거칠고 거센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스승님은 ‘그렇게 하는 거여’라며 칭찬하셨다.”

그제야 스승은 그에게 얘기해주었다. “그때 스승님은 중고제 ‘적벽가’는 ‘심청가’ ‘춘향가’처럼 평범한 보통 사람들 얘기와는 다르다. 삼국을 호령한 영웅호걸 목소리를 담아내야 한다. 웅장하고 거세고 강하게 불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중고제는 욱여내는 강한 소리란 걸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배운 중고제 ‘적벽가’는 40분 분량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후반부는 박 명창이 중고제 명창들의 유성기 음반을 듣고 복원해 다시 만들어나갔다. 2010년 무렵 2시간30분의 완창 판소리로 만들었다. 이렇게 나온 완창본을 꾸준히 갈고닦아 그동안 충청지역 일대에서 선보여왔다.

박성환 중고제 적벽가 완창 포스터. 한국중고제판소리진흥원 제공
박성환 중고제 적벽가 완창 포스터. 한국중고제판소리진흥원 제공

박 명창은 창극 전문가이기도 하다. 국립창극단 부수석까지 지냈다. 국립극장 국가브랜드 공연 <청>, 차범석 희곡 원작 <산불>, 브레히트 원작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등 국립창극단 안팎에서 직접 대본을 쓰거나 연출한 창극이 30여편에 이른다.

마지막으로 박 명창은 이날치, 씽씽밴드 같은 퓨전 국악 그룹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 관련해 얘기했다. “정통 국악이 큰 나무 뿌리처럼 깊게 뻗어나가고, 그런 바탕에서 다채로운 꽃이 피듯 퓨전 국악의 창의적인 시도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에게 국악이 깊고 쉽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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