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편지>의 한 장면.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한 아시아계 여성이 종이에 쓰인 글을 읽기 시작한다. 베트남어로 추정되지만, 정확하게 어떤 언어인지조차 모르는 관객은 그 글을 읽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점점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는 것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알 수 없는 슬픔이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말이 통하지 않을 때의 답답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큐멘터리 <편지>(이현정, 2014)는 이와 같은 실험적인 형식을 통해서, 관객에게 영화 속 주인공이 처했던 상황을 미리 경험하게 한다.
그 글은 베트남 여성 후인 마이가 2007년 6월25일 그의 한국인 남편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는 7년이 지난 시점 다시 읽힌다. 베트남 여성이 4분여 동안 편지를 다 읽고 나면, 한국어로 번역한 편지를 한국 여성이 읽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 드디어 알게 된다. 베트남 여성의 목소리와 한국 여성의 목소리가 교차하면서 관객은 한 여성의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큰 감정의 진폭을 경험한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꾸며 한국으로 온 후인 마이가 남편에게 쓴 편지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저는 당신 때문에 너무 슬퍼요.” 편지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이가 한국에 와서 남편을 이해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인 마이는 한국어를 잘 알지 못했지만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었고, 잠은 잘 잤는지, 일터에서 힘들지 않았는지, 건강은 괜찮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의 반대로 그러지 못했다. 한편 후인 마이는 완벽한 사람이란 없기에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이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들은 상견례를 거치고 제대로 결혼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지요. 좋으면 선택하고, 싫으면 안 해도 되는 그런 많은 여자 중에서 당신이 저를 골랐을 뿐이니까요”라면서 자신의 현실을 이미 직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후인 마이는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최선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베트남으로 자신을 보내주면 남편을 용서하고 원망하지 않겠다고 글을 쓰던 그는 결국 편지의 말미에 포기의 마음을 드러낸다. “당신은 내가 쓴 이 글씨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할 텐데요”라고. 편지를 쓴 다음날 후인 마이는 남편의 구타로 죽음에 이른다.
다큐멘터리는 후반부에도 계속해서 후인 마이의 편지를 읽는 베트남 여성과 한국인 여성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이 교차 편집 속에서, 이 슬픔에 공감하며 오열하는 여성들의 얼굴에 더 집중하게 된다. 여성들만이 이 아픔에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편지는 수신인과 발신인이 정해져 있는 글이다. 정작 수신인인 후인 마이의 남편은 당시 그 편지를 읽지 못했다.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이 편지는 그 남편뿐만이 아니라 결혼이주 여성이 점점 늘어나는 한국 사회에 사는 모두를 수신인으로 한 편지로 느껴진다. 꽤 오래전에 부쳐진 편지이지만, 여전히 나는 이 편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영화감독
<모래>(2011)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쓴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