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천변카바레>에서 배호로 변신한 황석정. 뮤직웰 제공
“배호 선생님은 재즈 드럼 연주자를 했기에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팝송을 부르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주위에서 ‘중학교밖에 못 나온 녀석이 대학 졸업한 사람이 부르는 노래를 하려고 하느냐. 카바레에서 트로트나 불러’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트로트 가수가 됐다고 해요.”
지난달 26일 서울 강남의 한 기획사 사무실에서 만난 배우 황석정이 말했다. 그는 4~7일 서울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 화암홀에서 열리는 뮤지컬 <천변카바레>에서 가수 배호를 연기한다.
“배호 선생님의 아버님은 대한광복군 대위 출신 독립운동가셨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목숨 바쳐 지켜낸 나라가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술을 계속 드시다가 돌아가셨어요. 배호 선생님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중퇴하고 노래를 불렀어요.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셨죠.”
배호는 중후한 저음과 특유의 바이브레이션으로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등을 히트시키며 1968년 <문화방송>(MBC) 10대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1971년 신장염으로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인기 정상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자, 그의 음색을 따라 한 모창 가수들이 ‘가짜 음반’을 내기도 했다.
뮤지컬 <천변카바레>에서 순심으로 변신한 황석정. 뮤직웰 제공
“돌아가신 아버지와 배호 선생님이 닮은 점이 많아요. 우리 집안이 피난민이었다가 부산에 정착했는데, 배호 선생님도 부산에 사신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밴드에서 트롬본을 연주하셨는데, 배호 선생님이 원래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셨어요. 아버지가 인정하는 가수가 많지 않았는데, ‘배호는 노래 잘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배호 선생님이 부산에서 노래 불렀을 때, 아버지가 연주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황석정은 불멸의 가객 배호, 웨이터에서 모창 가수가 되는 춘식, 시골에서 상경한 순심, 밤무대 가수 미미, 야비한 음반사 사장 등 남녀를 번갈아가며 변신한다. 무대에선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일인다역의 효과를 높인다.
뮤지컬 <천변카바레>에서 춘식으로 변신한 황석정. 뮤직웰 제공
어떻게 일인다역을 맡게 됐을까? “9월까지 대학로에서 호메로스 서사시를 독백하는 1인극 <일리아드>를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좀 쉬려고 했는데, 이 역할을 제안받았어요. 1인극이 너무 힘들었는데, 또 1인극이어서 처음엔 안 하려고 했어요. 근데 11월7일이 배호 선생님이 타계하신 지 50년 되는 날이거든요. 배호 선생님에게 헌정하기 위해 하게 됐네요.”
<천변카바레>는 한국 창작 뮤지컬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시리즈 뮤지컬이다. 한국 근현대 대중음악사로 그 시대의 사회상과 서민들의 삶을 그린다. ‘오빠는 풍각쟁이’ ‘왕서방 연서’ 등 일제강점기 노래를 담은 뮤지컬 <천변살롱>(1930~1950년대)에 이은 뮤지컬이 <천변카바레>(1960~1970년대)다. <천변소극장>(1980~1990년대)은 현재 준비 중이다.
뮤지컬 <천변카바레>에서 홀로그램 촬영 중인 황석정. 뮤직웰 제공
황석정은 배호 노래가 어렵다고 했다. “20대 젊은 나이에도 노래 한곡 한곡 심혈을 기울여 부르셔서 따라 하기가 어려운 거죠. 너무 아프셔서 병상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어요. 숨이 차서 한박자 쉬었다가 넘어가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요. 원래 재즈를 했던 분이셔서 리듬을 잘 운용하시는 것 같아요.”
지금 배호를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배호 선생님이 노래를 부르셨을 때는 산업화가 시작될 때였죠. 많은 사람이 공장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힘들게 노동하던 시절이었죠. 그분들 애환을 대신 표현해줬기에 서민들에게 큰 인기를 누렸죠. 지금도 삶에 힘들어하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분이 많은 것 같아요.”
황석정은 작품마다 짧게 나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신스틸러’로 불린다. “제가 가진 에너지가 낯설고 야생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네가 나오면 갑자기 다큐가 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거든요. 배우 같지 않아서 그런 것 같나요?(웃음)”
그는 지난해 한 스포츠채널에서 주최한 피트니스 대회에서 근육질 몸을 선보여 ‘머슬퀸’이란 별명도 얻었다. “대회에 참가하기 전 두달 동안 매일 운동했죠. 그런데 <일리아드>를 할 때 너무 힘들어 ‘혼술’ 좀 했더니, 근육이 어디로 가버리고 없네요.(웃음)”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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