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한 공연을 앞둔 헝가리 태생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가 “콩쿠르 출전을 멈추라”며 국제 음악콩쿠르 유용성 논쟁에 불을 지폈다. 나디아 로마니니/이시엠 레코드 제공
내한 공연을 앞둔 저명한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68)가 국제 음악콩쿠르의 유용성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콩쿠르 출전을 멈추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콩쿠르에 도전하거나 입상한 젊은 연주자들에게 주고 싶은 조언’을 묻자 나온 답변이었다. 최근 젊은 연주자들이 잇따라 우승하며 ‘콩쿠르 강국’으로 떠오른 국내에서 그의 이 발언은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클래식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시프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졌고, ‘음악계 현실을 무시한 이상론’이란 비판과 ‘귀담아들을 대목이 있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시프가 콩쿠르를 비판한 주요 논거는 ‘예술의 측정 불가능성’이었다. “예술은 ‘측정 불가능한 요소’들로 이뤄진, 고도의 주관적인 영역이죠. 음악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며, 바로 이것이 음악콩쿠르가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그는 “속도와 힘, 스태미나와 정확도 등의 요소들은 측정이 가능하지만, 이런 것들은 스포츠가 아니냐”며 “경쟁이라는 것 자체를 그만두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클래식 저변이 좁은 국내 현실에서 콩쿠르 경력도 없이 연주 기회를 갖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저명한 콩쿠르에서 우승해도 1, 2년 반짝할 뿐 새로운 우승자가 나타나면 금세 잊히고 만다. 조성진, 임윤찬 등 일부 스타 연주자에 대한 관객 쏠림 현상도 심각할 정도다. 콩쿠르는 대중의 관심을 높여 클래식의 저변을 넓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에서 ‘콩쿠르 출전을 멈추라’는 시프의 발언은 ‘물정 모르는 유럽 중심주의’로 비치기 십상이다. 지난해 독일 본 베토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서형민은 “콩쿠르가 극도로 주관적인 건 맞지만 콩쿠르라도 없었으면 ‘그들만의 리그’가 돼버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연줄이 작용하고 ‘제자 챙기기’ 등의 또 다른 폐해가 우려된다는 얘기다. 그는 이달 말까지 독일 11개 도시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협연 중이다. 그는 “콩쿠르 우승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을 기회”라고 했다.
다만, 콩쿠르 비중이 커지다 보니 학교교육이 콩쿠르 위주로 진행되고 학생들도 콩쿠르에 과다하게 얽매이는 부작용도 있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총장은 최근 “학생들이 어느 순간부터 콩쿠르에 집착하면서 음악을 전공하는 목표가 돼버린 것 같다”고 아쉬워하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연주자들이 존재를 증명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통로가 국내에선 콩쿠르 입상밖에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콩쿠르가 개성 있는 연주보다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표준적 연주를 선호한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심사위원들의 ‘타협의 산물’로 우승자가 결정되면서 특출난 연주자가 아니라 반감이 적은 연주자가 낙점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콩쿠르에 도전하는 연주자들도 개성을 드러내기보다 무난한 연주를 중시하게 되는데, 이는 예술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하기 어렵다.
개성있고 자유로운 연주로 명성을 얻은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가 11월6일과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과 부산문화회관에서 연주회를 연다. Yutaka Suzuki
언드라시 시프는 이전부터 ‘격렬한 콩쿠르 반대론자’였다. 색깔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한 그의 연주는 호불호가 갈렸고, 명성 있는 국제 콩쿠르에서 끝내 우승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시프도 콩쿠르의 수혜자였다. 그 자신이 15살 때 헝가리 텔레비전 방송이 주최한 ‘젊은 재능을 발굴하는 콩쿠르’에서 우승해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1974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정명훈이 2위, 시프가 4위를 했고, 이듬해인 1975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는 시프가 3위, 정명훈이 5위였다. 우승은 아니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이력이었다. 시프는 김선욱, 조성진, 문지영 등 국내 젊은 피아니스트들을 지도했다. 독일 크론베르크 아카데미에서 올해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첼리스트 최하영도 가르쳤다. 그는 “한국엔 어마어마한 재능을 지닌 연주자들이 많다”며 “이들은 보호하고 육성해야지, 경쟁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콩쿠르를 비판하는 핵심이 과다한 경쟁에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개성을 중시하는 시프는 연주회에서도 즉흥성과 자유로움을 강조한다. 다음달 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과 11일 부산문화회관에서 열릴 그의 공연에서 그가 무슨 곡을 연주할지 아무도 모른다. 공연장 음향과 피아노 상태, 관객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현장에서 결정한다. ‘놀라움도 공연의 한 요소’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번에도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 연주할 작곡가만 공개했다. 그는 “자유와 즉흥의 힘을 믿는다”며 “2년 뒤 오늘 저녁 식사로 무엇을 선택할지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나는 훨씬 큰 자유로움을 느끼고 관객에게도 공연이 더 새로워질 수 있다”고 했다.
콩쿠르 찬반 논쟁은 끝없이 이어져왔다. 콩쿠르라는 제도엔 빛과 그림자가 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콩쿠르가 음악적, 산업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대진 한예종 총장은 “예술 교육의 목표가 콩쿠르는 아니지만 콩쿠르에는 분명히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한다”며 “수많은 학생의 콩쿠르 입상이 한예종 역사 30년에서 중요한 동력이 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시프의 극단적인 콩쿠르 비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기보다 콩쿠르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개선점을 찾는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온라인 클래식 동호회 ‘슈만과 클라라’ 운영자인 전상헌씨는 “시프가 지적하는 핵심 메시지는 젊은 음악가들보다 국내 음악 교육자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라며 “젊은 연주자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콩쿠르 입상 실적에만 집착하기보다 예술적인 고민과 창의적인 시도를 좀 더 장려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