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조선 선조 때 풍양 홍씨에 넘어간 땅
1956년 비로소 농민들 품으로…
한겨레문화센터서 글쓰기 배우며 책 준비
1956년 비로소 농민들 품으로…
한겨레문화센터서 글쓰기 배우며 책 준비
“300년 ‘땅 찾기투쟁’ 이젠 응어리 좀 풀려”
“책을 쓰면서 마음이 무척 편해졌어요. 응어리가 풀렸다고 할까요?”
<하의도 농민운동사>의 지은이 김학윤(70)씨는 “워낙 당하고만 살아왔기 때문에 스스로 생각해도 독했다”고 말했다.
“어려서 하의3도 농지에 얽힌 역사를 들으며 자랐어요. 땅을 되찾기 위해 항쟁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요.” 그동안 그것에 관한 기록이 없지는 않았다. <하의3도 토지쟁의 실기>(김응재, 1946), <눈뜨는 섬>(박호재, 1993), <하의3도 농지탈환 운동의 전개과정)(손형섭 박찬승, 1999) <일본인 지주의 하의도 토지수탈과 토지회수 운동>(이규수, 1996) 등. 이 책은 하의도 ‘후손’이 기록한 300여년 농민항쟁의 ‘전모’다.
분쟁의 씨앗은 1623년. 선조와 계비 김씨(인목대비) 소생 정명공주가 풍양 홍씨 집안에 시집가면서 하의3도 땅 20결은 홍씨의 4대손까지 세미를 받아먹게 되었다. 5대손 홍상한은 1729년 그 땅을 반환해야 하는데 오히려 농민들이 새로 개간한 논밭 140결에서까지 결세를 걷어갔다. 1870~1899년 농민 손에 잠깐 쥐어졌다가 홍씨 집안으로 다시 넘어간 그 땅은 조병택·백인기-정병조-우콘 곤자에몬-가미나미 신조-도쿠다 야시치-신한공사한테로 소유권이 이어졌다. 물론 그동안 농민들의 진정과 소송, 소작료 불납운동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숱한 농민들이 잡혀가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해방공간에서는 경찰 총에 농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한맺힌 땅은 농민들의 청원에 따라 제헌국회가 1950년 2월13일 무상환원을 결의해 1956년 비로소 불하형식으로 농민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94년 누락된 등기처리가 완결돼 1729년 시작된 하의도 농민의 기나긴 제땅찾기 투쟁은 짧게는 265년, 길게는 333년만에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만약 항쟁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그 땅은 반환되지 않았을 거요. 땅도 땅이지만 농민들의 항쟁은 소중한 유산입니다.”
김씨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글쓰기를 배운 것도, 수필로 등단한 것도 농민운동사를 정리하려는 집념의 소산이다. 학자를 대신해 왕조실록, 비변사등록, 재판기록, 국회속기록 등을 뒤진 것도 그렇다. ‘내고향 하의도-제땅 되찾기 농민항쟁’을 <창작수필>에 2년동안 연재하면서 팬클럽(연사모)도 생겼다. 회원이 무려 111명. 일본인으로서 하의도 농민운동을 지도한 아사히 겐즈이에 대한 기록을 새로 찾아내고, 국회 결의날짜도 1950년 2월2일이 아니라 2월13일임을 새로 밝혀냈다.
그는 불하형식의 반환을 비판하는 학자들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1헥타당 200원에 명목상 유상불하하면서 무상이었다면 농민들이 내야할 등기비 부담을 정부가 떠맡았다는 것. 거기에는 유옥우 전 의원의 공로가 컸다.
미진한 것 한 가지. 1908년 소작료 재판 당시 2심승소를 끌어낸 이는 일본인 변호사 고노 부쓰노스케. 그 뒤에는 양심적인 한국인 사무장 남만웅이 있었다. 그는 그의 신원을 알아 널리 공로를 알리고 싶다는 것. “자료를 조사하면서 벼라별 사람들을 다 맞닥뜨렸지만 하의도 사람만큼 희한한 사람은 없습디다. 내부에서 생기기 마련인 앞잡이나 변절자에 대한 보복사건이 한번도 없었어요.”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미진한 것 한 가지. 1908년 소작료 재판 당시 2심승소를 끌어낸 이는 일본인 변호사 고노 부쓰노스케. 그 뒤에는 양심적인 한국인 사무장 남만웅이 있었다. 그는 그의 신원을 알아 널리 공로를 알리고 싶다는 것. “자료를 조사하면서 벼라별 사람들을 다 맞닥뜨렸지만 하의도 사람만큼 희한한 사람은 없습디다. 내부에서 생기기 마련인 앞잡이나 변절자에 대한 보복사건이 한번도 없었어요.”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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