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뜬 ‘솔아 푸른 솔아’ 박영근 시인 추모글 쏟아져
“너에 대한/말을 잊고/식전부터, 사십 년 전 뽕짝 듣는다/어이 맺은 하룻밤에 꿈//세상은 너무 넓어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고/영원하라/꿈은”
‘노동자 시인’ 박영근씨의 이른 죽음이 알려진 12일 오전 민족문학작가회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동료 시인 오철수씨의 조시 〈꿈속의 사랑 - 박영근 시인이 죽었다. 편히 가소서〉가 올라왔다. 이 짧은 조시는 앞서 박 시인의 쾌유를 빌며 올렸던 다른 이들의 글에 대한 답처럼 읽혔다. 오씨의 조시에 이어 후배 시인 김주대씨는 ‘영근이 형, 전화번호를 지웠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영근이형, 전화번호를 지웠어요
“형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서 지웠어. 울었어요. 형이 취해서 새벽에 전화할까봐 그랬던 거 아니야. 내가 취해 형에게 전화할까봐, 이제 세상에 없는 형에게 전화하다가 내가 죽을까봐 무서워서 그랬어. 형 미안해. 형의 전화번호가 무서웠어.…”
박영근 시인의 죽음은 동료 문인들 사이에 커다란 충격과 슬픔을 몰고 왔다. 김준태·이재무·유용주씨 등 선후배 시인들이 다투어 추모 시를 쏟아 냈다. “형국은 다르지만, 김남주 시인이 시대와 불화하다가 병을 얻고 세상을 버린 94년의 일을 떠오르게 한다”고 시인 김사인(51)씨는 말했다. 지난달 말 발간된 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에는 박영근 시인의 생전 모습을 담은 시도 들어 있다. 지난해 봄 김사인씨가 현대문학상을 받던 수상식장에서의 일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삶는 소리를 지르며 점잖은 식장 복판까지 쳐들어와 비닐봉다리를 쥐어주고는 우리 뽀뽀나 하자고, 뽀뽀를 한번 하자고 꺼멓게 술에 탄 얼굴을 들이대는 봄밤이다.”(〈봄밤〉 부분)
시에서도 드러나지만 박 시인의 성급한 죽음 뒤에는 술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그는 술을 주식으로 삼을 만큼 통음을 하며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결국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기 전까지 입원과 진료도 거부했다.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이라는 진단이 나오기까지는 장기적 영양 결핍이 큰 몫을 했다.
인생을 어느 대목에서 놓아버려
동료 시인 이재무씨는 “조심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일종의 소극적 자살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했다. 김사인씨 역시 “자기 인생을 어느 대목에서 놓아 버린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는 “시를 쓰건 안 쓰건 있어 줘야 하는, 귀한 자리가 있는 사람이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영근 시인장’ 집행위원장을 맡은 시인 이승철씨는 “술이건 사랑이건 문학이건 온몸으로 투신하는 사람이었다”며 “그의 죽음 역시 노동문학이 쇠락한 시대적 상황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박영근 시인은 1958년 전북 부안 태생으로 명문 전주고를 중퇴한 뒤 상경해서 노동에 종사했다. 1981년 〈반시〉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84년의 첫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를 비롯해 〈대열〉 〈김미순전〉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 등 다섯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신동엽창작기금과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첫 시집에 실린 〈솔아 푸른 솔아〉는 안치환씨가 만들어 부른 노래의 원작시이기도 하다.
“솔아 솔아 푸른 솔아/샛바람에 떨지 마라/어널널 상사뒤/어여뒤여 상사뒤//(…)//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살아서 가다가 가다가/허기 들면 솔잎 씹다가/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네가 묶인 곳, 아우야/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가겠네, 다시/만나겠네.”(〈솔아 푸른 솔아〉 부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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