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공비행
아침에 신문을 펼쳤다가 워렌 버핏이 35조원을 기부한다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상투어가 떠오르는 기사를 읽었다. 떠오르는 게 있으면 가라앉는 게 있는 법. 이제 경제신문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한국의 워렌 버핏’이라는 상투어는 사라지게 됐다. 지금까지는 주식투자 잘 하면 ‘한국의 워렌 버핏’이라는 수사를 붙였는데, 이제는 돈 많은 사람들이 이 상투어에 질겁할 테니까.
기부금 액수만 해도 넋이 빠질 정도인데, 그와 친구인 빌 게이츠의 말들이 내 가슴을 울렸다. 버핏이 부시 미국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시도를 두고 “혐오스런 행위”라고 말한 건 약과다. 나를 놀라게 한 건 “15년이 걸리든 25년이 걸리든 우리 생애에 에이즈 백신이 개발되길 꿈꾼다”는 빌 게이츠의 말이었다. 미안해, 빌. 그동안 윈도우의 파란 화면이 뜰 때마다, 혹은 빌어먹을 프로그램이 응답하지 않을 때마다, 그리하여 나의 보석 같은 원고들이 날아갈 때마다 맹렬하게 너를 욕한 것.
솔직히, 나 감동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아프리카의 돌풍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왔는데, 사실 에이즈 문제를 그대로 놔두면 아프리카의 돌풍이라는 말도 ‘한국의 워렌 버핏’이라는 수식어와 마찬가지의 신세가 될 것이다. 예컨대 보츠와나에서는 2000년 현재 65세였던 평균수명이 2005년에는 31세로, 짐바브웨에서는 53세였던 것이 27세로 줄어들 전망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보츠와나에서는 이을용, 짐바브웨에서는 설기현의 나이 정도면 인생 다 산 것이라고 봐야한다는 말이다. 이런 판국에 무슨 수로 국가대표팀을 소집할 수 있을까.
이 속수무책의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다. 전세계 에이즈 환자의 75%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거주하는데, 이들 환자의 치료비로 나가는 돈이 1년에 300달러 정도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이 돈은 작은 농장이 벌어들이는 1년 수입의 절반쯤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에서 문제는 바로 돈, 오직 돈이다. 그럼 돈은 어디로 갔는가? 미국 잡지 <포보스>에 따르면 돈은 부자들에게 갔다. 2002년 세계 최대 부호 7명은 6억 5천 만명이 살고 있는 저개발국 49개국의 국내총생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02년 <포보스> 선정 세계 최고의 부자 1위가 빌 게이츠였고 2위가 워렌 버핏이었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게도 내 생애에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을까, 고민하던 중 이명박 서울 시장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이명박 시장은 기업의 상속세가 너무 무거워 법을 지키면서 상속할 경우 2~3대면 기업이 문을 닫거나 매각될 수밖에 없다면서 기업의 상속세를 대폭 낮춰 부담 없이 상속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단다. 버핏의 기부와 관련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여론의 압력을 통해 사유재산의 사회헌납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국가권력”이라고 우리 처지를 설명했는데, 혹시 이 시장이 말하는 부담과 조선일보가 말하는 압력이 같은 뜻인지 모르겠다.
그렇거나 말거나, 압력이든 부담이든 좀 시시하다. 아, 이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번다는 게 그렇게 부담스럽고 압력이 많은 일이었구나, 하는 이해심은 전혀 안 생긴다. 잘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압력과 부담을 느끼고 산다면, 보통 사람들은 무슨 희망으로 살아가야만 하나. 돈이 없다면 꿈이라도 꿔야 할 텐데. 잘 사는 게 무슨 죄인가, 잘 사는 사람답게 ‘부담 없이’ 살 생각하지 말고 ‘잘’ 살면 되는 거지. 그래서 이런 소리를 두고 무병신음, 병 없이 앓는 소리라고 한다. 10위 안에 든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전 재산을 기부해도 이 끙끙대는 소리만은 없애지 못할 것이니 나도 내 생애에 그런 신음이 없어지기를 꿈꾸는 소망 정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피력하고 싶다.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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