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살무늬토기·고인돌
비무장지대와 길거리 응원이 걸쳐있는 현대시기를 훌쩍 뛰어넘어 선사시대에 해당하는 문화상징물로 빗살무늬토기와 고인돌이 눈에 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참으로 ‘시원’, 그 자체였다. 머리를 빗듯, 토기를 빗어서 역사의 지문을 남겼다. 이름조차 빗살무늬(즐문토기)다. 그 무늬에는 선사시대의 ‘결’이 각인되어 있다.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영향이라거나 북유럽 일대에서 왔다는 문화전파설도 있지만 자생설도 만만치 않다. 모든 문화의 독립·자생적 발생만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나, 전파설에만 기대는 것도 문제다. 사실 빗살무늬는 중국 동북지방과 연해주 일대에서도 흔히 발견되지만 암사동을 비롯한 한반도 빗살무늬가 단연 압권이다.
땅을 파고 소박하게 장작더미를 싸놓아 흙을 구으면서 만든 단순 질박한 토기의 힘. 빗살무늬의 미학적 힘이다. 우리 예술사의 첫대목을 쓰게 만드는 예술품이자 생활도구사의 초반부 유물이기도 하다. 고고학에서 말하는 ‘토기학’ 교과서의 지론처럼 질그릇들은 당대인들의 삶의 풍경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흔적이다.
고인돌은 어떠한가. 서유럽, 북아프리카, 중국 랴오닝성과 산동반도, 큐슈에도 고인돌은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그중에서도 단연 ‘고인돌의 나라’가 아닐까. 북방식, 남방식의 구분법도 존재하지만 기원과 유래에 관한 논쟁은 고고학자들 몫일 것이며, 일반인들은 거석문명 앞에서 영혼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영국 웨일스 해변마을에서 5천년 전 고인돌을 발견하고 매혹되어 <거석을 찾아서 내 영혼을 찾아서>란 명작을 쓴 미국의 작가 M.스콧의 마음과도 같은 것이리라.
고인돌은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미학적이다. 홀로 솟구친 웅장·장엄한 풍경 못지않게 돌무더기들이 떼지어 시위하는 풍경은 인상적이다. 돌을 옮기는 과정을 재연하는 실험고고학 현장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선사시대를 이해시키는 충분한 공부거리다.
과거 고인돌은 분명 무덤이거나 족장문화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고인돌은 그 자체가 환경조각일 수 있고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의 박물관들이다. 그래서 ‘버림받았던’ 고인돌을 지자체마다 ‘공원’‘박물관‘ 등으로 옮기거나 작명해 대접한다.
때로 노예적 동원을 연상케하는 고인돌은 족장의 권위를 지켜주기 위한 힘겨운 삶을 웅변하기도 한다.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고 제 자리에 서있는 거석들은 그 무게중심만큼 경외심을 품게 만든다. 천년을 사는 나무도 세월이 가면 죽기 마련이나 돌은 움직임 없이 붙박이다. 선사시대 오솔길에서 마주친 거석을 보며 태고의 시공에 비춰진 역사와 인생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으리라.
주강현·한국민속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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