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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하루키회고록] 백낙청씨는 알면 알수록 큰사람이었다

등록 2006-09-28 18:38수정 2006-09-28 20:07

1975년 12월18일 도쿄에서 열린 집회 ‘일한조약(한일협정) 10년의 역사를 역전시키기 위래 우리는 생각한다’에 패널 토론자로 참석했다. 오른쪽부터 아오치 신, 무토 이치요, 그리고 필자.
1975년 12월18일 도쿄에서 열린 집회 ‘일한조약(한일협정) 10년의 역사를 역전시키기 위래 우리는 생각한다’에 패널 토론자로 참석했다. 오른쪽부터 아오치 신, 무토 이치요, 그리고 필자.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⑫ <창작과 비평>에 빠져들다

1976년에도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자 큰 반향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 청년이 100만인 지지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일한연대연락회의는 1977년 들어 다시 김대중사건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국회에 조사위원회를 만들도록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우쓰노미야 도쿠마 의원, 사회당, 신자유클럼, 공산당, 공명당 등의 지지속에 활동했다.

1977년에 우리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는 한국의 많은 다양한 지식인들과 알게 됐다. 한국어를 조금 읽을 수 있게 되자 자연히 도쿄에 있는 삼중당이나 고려서점 등을 찾아가 한국서적을 살펴보게 됐다. 내가 최초로 주목한 것은 두 개의 잡지였다. 하나가 <월간 대화>, 또 하나가 계간 <창작과 비평>이었다.

<월간 대화>는 그 화려한 표지로 내 눈을 빼앗았다. 한국크리스천 아카데미의 기관지를 증면 혁신해서 ‘오늘의 역사와 사회를 투시하는 사회문화종합지’를 지향하겠다며, 새 편집장에 임정남씨를 앉혔다. 그 혁신 첫호 1976년 11월호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아카데미 원장의 대담 ‘이 민족에 희망을’, 시인 고은의 평론 ‘역사와 지식인’, 최옥자 논문 ‘한국 여성운동을 반성한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석정남의 수기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실렸다. 석정남의 수기 에피그램에는 마루야마 가오루의 시 <어머니의 우산>이 인용돼 있어 흥미를 끌었다. 12월호에는 법정 스님의 연재 칼럼 첫회 ‘출가’, ‘미공개 발굴자료 일본저항수기 <역사속의 아픈 목소리들>’ 등이 실렸다. 한국에서 이런 잡지가 나왔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이 두 책을 사서 먼저 법정 스님의 ‘출가’를 읽었다.

“사람은 자신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 노력은 개인이든 조직체든 다를 바 없다. …권력도 조직도 없는 개인이 자기 환경을 개조하거나 재구성하려면 그는 자기 한계를 알기 때문에, …몸소 버리고 떠난다. …출가란 이와 같이 버리고 떠남이다. 묵은 집, 집착의 집, 갈등의 집에서 떠났다고 해서 출가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럼 너는 어째서 출가했느냐? 부처가 지금 이 자리에서 묻는다 할지라도 나는 다음 같이 대답할 것이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다라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으로써 오히려 홀가분한 자유를 누리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기 위해.”

나는 깊이 감동했다. 한국의 지식인이 이런 높은 정신성을 일본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 이런 잡지의 논문을 골라내 소개하는 책을 낼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 속에서 싹텄다.

77년 4월호에는 성래운의 ‘인류와 함께 동포가 살아가는 길’이 실렸다. 8월호에는 리영희의 ‘광복 32주년의 반성 ’이 실렸다. 이들 논문은 나로서도 읽을 만했다. 문장이 알기 쉽고 사상이 명석했다. 리영희씨는 일본인이 망언을 되풀이하는 것의 “근원적인 책임과 잘못이 과연 일본인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일본인들이 져야 할 책임에 못지 않은 양의 잘못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는 것일까?”, 망언이 되풀이되는 것은 “그것을 허용하는 근거가 이 민족, 사회, 국가 내부에 존재해 있는 탓도 있다고 생각된다”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일한관계를 논하는 방식을 근저에서 바꾸도록 주장한 획기적인 논문이었다.


〈창작과 비평〉1977년 가을호.
〈창작과 비평〉1977년 가을호.
<월간 대화>와 비교하자면, <창작과 비평>은 훨씬 아카데믹한 내용이고 또 장대한 논문이 많아 손대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처음 산 것은 76년 여름호(40호)였다. 그때부터 77년 여름호(44호)를 사고, 77년 가을호(45호)를 사기에 이르러서는 나는 아주 이 잡지에 빠져버렸다. 45호 권두문은 ‘분단시대의 민족문화’라는 제목의 300매 짜리 강만길, 김윤수, 리영희, 백낙청 등의 좌담회였다. 그 중요성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이걸 읽고 싶다, 누가 전문을 번역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고개를 들었다.

일한연대연락회의 운동도 어언 3년 반이나 해 왔는데, 이대로 정부나 사회를 향해 정면공격을 해봤자 사태를 바꿀 수 없다. 더욱 한국을 깊숙이 이해한 다음 거기서 진정한 일한협력의 길을 제시해서 정부와 여론을 뒤흔들어갈 필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한연대연락회의는 처음엔 옛 베헤이렌 사무실 한구석을 얻어쓰고 있었으나 75년 6월부터는 다카타노바바의 빵집 2층에 독립 사무실을 차려놓고 운동을 했다. 운동 멤버중에 나이든 축은 아오치 신씨와 나, 다카사기 소지, 시미즈 도모히사씨로, 나머지는 청년들이었다. 지지자의 모금과 뉴스 구독료 등으로 어떻게든 수입 지출 아귀를 맞추고 있었으나 모금 활동이 점차 어려워져 적자가 계속되자 아오치씨와 내가 적자를 메웠는데 매월 상당액을 부담해야 했다. 이대로는 계속할 수 없었다.

더우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소련에 10개월 해외연구차 나갈 가능성이 열렸던 것이다. 73년에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소련을 방문해 학자교환 약정을 맺은 결과 학자들이 소련에 장기 체류하며 연구할 수 있게 돼, 제1진이 75년에 출발했다. 나도 러시아 연구자로서 그 기회를 살려야 했다. 하지만 일한연대연락회의 사무국장으로서 사무실 유지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는 한 장기 러시아행은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아오치 대표와 상담하고 78년 가을에는 조직을 개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나는 77년 가을 소련행 신청서를 제출했고 연말에 허가를 받았다.

결국 일한연대연락회의를 지식인 주체의 일한연대위원회와 청년들 그룹으로 나누는 개조를 단행하기로 했다. 함께 고생해온 청년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그런 방안을 추진하던 중인 78년 2월, 리영희씨가 체포당한 반공법위반사건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일한연대 뉴스> 40호에 ‘진실이 궤변으로 보일 때- 리영희씨와 <전환시대의 논리>’를 썼다. 나는 이 유명한 평론집도 손에 넣었다. 그때 그 사건은 창작과 비평사에서 나온 <8억인과의 대화>와 한길사에서 나온 제2 평론집 <우상과 이성>이 처벌대상이 된 사건이었다. 창작과 비평사 대표 백낙청씨도 조사를 받았다. 바로 그때 <창작과 비평> 78년 봄호(47호) 권두에 민주화운동의 기수 가운데 한사람인 박형규 목사와 백낙청씨의 대담 ‘한국기독교와 민족현실’(240매)이 실렸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를 통해 곧바로 전문번역됐다.

나는 이 단계에서 <창작과 비평> 영인본 전10권(1호부터 38호까지)을 구입했다. 나는 다카사기 소지씨와 상담해 이 잡지 논문선을 번역 출판하기로 결단했다. 아오치씨한테서 소개를 받아 사회사상사로부터 출판하겠다는 승낙을 얻어냈다. 우리 외에 교토대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연구한 미야지마 히로시, 미즈노 나오키 두 사람에게 부탁해 번역진에 합류토록 했다. 나는 굳이 백낙청씨의 창간사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번역에 도전했다.

그것은 백낙청이라는 사람이 알면 알수록 큰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해인 38년생인 이 사람이 65년에 이 잡지를 창간하고 나중에 출판사까지 설립해 이미 10년 이상이나 유지해온 것,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D.H.로렌스 연구 업적을 토대로 75년에 ‘민족문학’을 제창하기에 이른 것, 또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77년에는 마침내 ‘3·1 민주선언’에도 서명한 것 등 어떤 점으로 봐도 경복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으로 잡지를 창간한 것인지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이 논문 결론에서 백낙청씨는 이렇게 썼다.

“이상이 메마르고 대중의 소외와 타락이 심한 사회일수록 소수 지식인의 슬기와 양심에 모든 것이 달리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식인이 그 소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만나 서로의 선의를 확인하고 힘을 얻으며 창조와 저항의 자세를 새로이 할 수 있는 거점이 필요하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바로 그런 거점으로서 <창작과 비평>은 태어났던 것이다. 내 번역문은 김학현씨에게 교열을 부탁했다. 78년 7월 일한연대연락회의는 해산했으며, 아오치씨 자택을 연략처로 하는 일한연대위원회가 발족했다. 위원에는 시미즈 도모히사, 구라쓰카 다이라, 쓰루미 슌스케, 나카이, 히다카 로쿠로씨 등이 참여해 주었다. 12월 번역 원고를 마무리하고 해설도 완료한 뒤 나는 소련으로 출발했다. 다카사기씨가 그 뒤 편집일을 맡아 <분단시대의 민족문화-한국 창작과 비평 논문선>은 79년 8월 내가 모스크바에 있을 때 출판됐다. <월간 대화>의 논문선은 79년 귀국 뒤에 착수해 80년 8월에 나왔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바로잡습니다

지난호 연재에서, 민청학련사건 당시 뿌려졌던 <민중의 소리>의 원작자가 조영래 변호사라고 기술돼 있는 것과 관련해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김학민 사무처장이 사실과 다르다며 다음과 같이 알려왔습니다. “<민중의 소리>는 1973년 말부터 수배생활을 하고 있던 장기표씨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얻어 준 방에 숨어 있으면서 작성하였다. 장기표씨는 <민중의 소리>를 완성한 뒤, 이를 1974년 3월 말 당시 서울대 상대에 재학중이던 김병곤씨에게 주어 민청학련 시위 때 살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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