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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떠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등록 2006-11-16 21:10수정 2006-11-16 22:25

찰리와 함께한 여행<br>존 스타인벡 지음.이정우 옮김. 궁리 펴냄. 1만2000원
찰리와 함께한 여행
존 스타인벡 지음.이정우 옮김. 궁리 펴냄. 1만2000원
“나는 내가 내 나라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에 관해서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이지만 나는 실은 기억에만 의존해왔다. 그런데 기억이란 기껏해야 결점과 왜곡 투성이의 밑천일 뿐이다. 나는 참된 미국의 언어를 듣지 못하고 미국의 풀과 나무와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르고, 그 산과 물, 또 일광의 빛깔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찰리와 함께한 여행> 13~4쪽)

“우리는 낙타들의 오랜 행로를 떠올렸다. 해질 무렵 그 짐승들의 아름다움을, 앞날을 모르는 무지를, 평화롭게 사료를 먹던 모습을. 그리고 그 짐승들이 연상케 하는 사람들의 모습들도 떠올렸다.”(<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14쪽)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1902~1968)과 1981년 수상자인 불가리아 출신 독일어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1905~1994)가 쓴 두 권의 기행산문집이 번역돼 나왔다. <찰리와 함께한 여행>은 스타인벡이 1960년 가을 거주지 뉴욕을 출발해 미국의 국경선을 따라 4개월에 걸쳐 모두 34개 주를 돌면서 쓴 책이다.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는 카네티가 1954년 영화 촬영을 위해 모로코를 찾은 친구들과 함께 천년 고도 마라케시에 머물면서 쓴 인상기.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br>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조원규 옮김. 민음사 펴냄. 9800원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조원규 옮김. 민음사 펴냄. 9800원

대표작 <분노의 포도>와 <생쥐와 인간>, 그리고 제임스 딘 주연 영화로도 알려진 <에덴의 동쪽>의 작가 스타인벡은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상에 매몰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좀처럼 여행길에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설계한 트레일러를 뒤에 매단 트럭 ‘로시난테’의 운전석에 오른다. 동행이라곤 찰리라는 이름의 프랑스산 푸들 한 마리뿐.

스타인벡의 여정은 뉴욕을 떠나 미국의 북동부를 한 바퀴 돈 다음, 캐나다와 접경에 있는 주들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서는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리건과 캘리포니아를 지나고, 애리조나에서부터 텍사스와 미시시피, 앨라배마 등 남부를 거쳐 버지니아와 펜실베이니아를 통과해 뉴욕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유려한 번역 돋보여


나이애가라 폭포를 난생 처음으로 본 기쁨도 잠시 그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 검문소에서 ‘까칠한’ 국경 관리 때문에 기분이 잡치고 만다. “정부는 사람을 너무도 미미하고 천한 존재로 만들어서 자존심을 도로 찾으려면 무엇인가 애를 써야만 한다”는 것이 이 불쾌한 조우의 결론. 국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서는 트레일러를 ‘움직이는 집’ 삼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난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미국 사람들, 아니 인류 자체가 떠돌아다니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반추한다.

“다시 없이 아늑한 항구가 언덕 위에 서 있는 도시”로 기억하고 있던 시애틀에서는 “토끼 사육장 같은 주택들을 짓기 위해 언덕 꼭대기를 평평하게 밀어버”린 모습을 확인한다. 과적에 의한 심각한 타이어 펑크 사고를 오리건 주의 친절한 주유소 주인의 도움으로 해결한 뒤 그는 고향 캘리포니아에 이른다. 어릴 적 4천 명 돌파를 자랑스럽게 발표했던 고향 설리너스의 인구는 어느덧 8만 명을 넘어섰다. “노새가 끄는 나무꾼의 짐마차가 느릿느릿 지나다니던 좁고 꾸불꾸불한 산길”은 4차선 콘크리트 하이웨이로 바뀌었다. 그는 변화와 발전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면서도 고향을 덮친 소란과 혼잡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만을 토로한다.

여행 말미에 작가는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두 여학생을 향해 온갖 상스러운 욕을 퍼붓는 백인 아주머니들과 그들을 구경하는 인파를 목격하며 슬픔과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사실상 여행의 종말 아니었을까. “나의 여행은 출발보다 훨씬 앞서서 시작되었고, 돌아오기 전에 먼저 끝났다.” 이제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마구 가속기를 밟던 그는 정작 뉴욕 시내에 들어와서 길을 잃고 만다. 유머러스하며 상징적인 결말. 이 책은 1965년 삼중당에서 <아메리카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것을 재출간한 것이다. 이메일은 물론 팩스도 없던 시절에 작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성을 기울인 번역자 이정우(1996년 작고)씨의 꼼꼼하고도 유려한 솜씨가 돋보인다.

“세 번 낙타와 마주하게 되었고, 세 번의 만남이 모두 비극적으로 끝났다.”

<모로코의 낙타와 성자>의 첫 문장이다. 사막의 상징과도 같은 낙타에 대한 여행자의 상상은 낭만적이기만 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마주친 낙타의 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군중과 권력>의 작가가 마라케시 외곽의 시장에서 발견한 낙타는 도살장에 팔려 가는 ‘예비 고기’일 따름이었다. 개중에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을 예감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놈도 있고, 아예 미쳐 날뛰는 축도 있었으니. “그 붉은 도시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낙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더 나누지 않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과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기행문 두 권이 나란히 번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카네티가 들른 모로코의 한 낙타 시장 모습. 민음사 제공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과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기행문 두 권이 나란히 번역 출간되었다. 사진은 카네티가 들른 모로코의 한 낙타 시장 모습. 민음사 제공

낭만과는 거리 먼 낙타에 대한 진실

그렇다고 해서 카네티의 마라케시가 음산한 죽음과 환멸의 도시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간판도 진열장도 가격표도 없는 시장의 가게들에서는 주인과 손님 사이에 긴장감 넘치면서도 신비로운 흥정이 이루어진다. 그런가 하면 광장의 눈먼 ‘성자’는 구걸한 동전을 입 속에 넣어 천천히 곱씹은 다음에야 주머니에 넣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 모습을 넋이 빠져서 지켜보고 있던 카네티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 가장 신기한 구경거리는 바로 어리둥절해하는 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반전.

시장의 이야기꾼들을 보며 문과 책상과 종이에 의존하는 “비겁한 몽상가”인 자신을 반성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그들은 시장의 소란 속에서 날마다 바뀌는 수백의 낯선 얼굴들에 둘러싸여, 차갑고 쓸데없는 지식에 압도되지 않고, 책과 야심과 대단한 명예도 없이 이야기를 한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바 ‘셰에라자드’에서 만난 불행한 여인 지네트는 어쩐지 영화 <카사블랑카>의 여주인공 잉그리드 버그먼을 떠오르게 하면서 여행지에서 느끼는 객수를 한껏 고조시킨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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