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왼쪽) 문학과사회(오른쪽)
‘현대문학’과 ‘문학과 사회’ 고 오규원 시인 추모특집
노평론가 김병익씩 등 문우제자들 시와 회고글 실어
다정한 친구와 엄한 스승에 대한 그리움 아련
노평론가 김병익씩 등 문우제자들 시와 회고글 실어
다정한 친구와 엄한 스승에 대한 그리움 아련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꼭 한 달 전인 지난달 2일 숨진 오규원 시인(1941~2007)이 병상에서 간병하던 제자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쓴 마지막 시다. 시인의 유해는 화장을 거쳐 5일 오후 강화도 전등사 경내 사고지 왼쪽 소나무 밑에 묻혔다(아래 사진). 수목장이었다. 죽기 직전에 쓴 시에서 예고했던 대로 시인은 지금 나무 속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문득 돌아보니,/규원이, 자네가 없네./둘러보아 찾아도/규원이, 자네가 없네./자네 앉았던 자리/아직 따스함 남아 있고/똘똘한 자네 목소리/귓가에 맴돌건만,/규원이, 자네는 이제 아무 데에도 없고/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네.”
전등사 산비탈 아래에서 열린 수목장에서 고인의 문우인 평론가 김병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씨가 읊은 자작시 <규원이, 지금 우리는>의 첫연이다. 고교 시절 이후로는 평론과 산문만을 썼을 뿐인 노 평론가는 친구의 죽음에 즈음해서 문득 시심을 지펴 올렸다.
김병익씨의 추모시는 월간지 <현대문학> 2월호가 마련한 오규원 추모특집의 일부로 발표되었다. 특집에는 김씨의 시말고도 김주영 김화영씨 등 고인의 또래 평론가들, 그리고 장석남 이진명 이병률씨 등 서울예전(지금의 서울예대) 시절 그한테서 시를 배운 제자들의 회고를 포함해 모두 11편의 추모 글이 실렸다. 이에 앞서 계간 <문학과 사회> 봄호 역시 시인 자신의 유고 시와 산문, 그리고 시인의 죽음을 전후한 정황을 정리한 제자 시인 이창기씨의 글로써 추모특집을 꾸몄다.
“외딴 집이 자기 그림자를 길게 깔아놓고 있다/햇빛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밖으로 조심조심 떨어지고 있다/바람도 그림자를 밀고 가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그림자 한쪽 위로 굴러가던 낙엽들도 몸에 묻은/그림자를 제자리에 두고 간다”(<빛과 그림자>)
휴대폰에 남긴 유고글도 정리돼
“통상적으로 모든 시는 의미를 채운다. 의미는 가득 채울수록 좋다. 날이미지시는 의미를 비운다.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비운다. 그러나 걱정 마라, 언어의 밑바닥은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이다. 내가 찾는 의미는 그곳에 있다. 그러니까 바닥까지 다 비운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는 존재를 통해서 말한다.”(<날이미지시에 관하여> 제9장)
<문학과 사회>에 발표된 고인의 유고 시와 산문은 그가 추구한 날(生)이미지시의 실체와 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견해를 오롯이 담고 있다. 시 <빛과 그림자>는 요양을 위해 산골 외딴 집에 머물던 시인이 빛과 그림자, 바람과 낙엽을 관찰하며, 의미를 비워서 존재를 부각시키는 날이미지시를 쓰는 모습을 떠올리게 만든다. 말년의 시인이 몸이 쇠약해져 원고지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고 휴대폰 문자로 틈틈이 기록했다는 산문 <날이미지시에 관하여>는 인용한 부분과 비슷한 분량의 15개 장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그가 추구한 날이미지시의 정체를 명료하게 설명한 중요한 문건으로 읽힌다.
“‘시를 좀 쓴다더니 이걸 시라고 낸 건가?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지.’ 2학년에 올라 선생님에게 제출한 내 시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재가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굴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대로 나가야 할지, 암담이란 그럴 때를 이르는 말이다.”
<현대문학>에 기고한 제자 시인 장석남씨의 회고글의 일부다. 제딴에는 시를 잘 쓴다고 자부하던 시인 지망생이 존경하던 선생님의 시 창작 수업 시간에 동료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없이 망신을 당하고 괴로워하는 정황이 잘 그려져 있다.
비슷한 고백을 여성 시인 이진명씨와 최정례씨의 글에서도 만날 수 있다.
미당문학상 거부 비화도 소개
“선생님이 내 시를 읽어내리는 동안 가슴의 고동이 제멋대로 치고박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선생님은 내 시를 읽고 빨간 밑줄도 안 쳐주고, 한마디 말도 안 해주는 거였다. 이럴 수는 없다. 왜 나만 빼놓나. 나는 빨간 밑줄도 쳐 받아야 하고 한마디 말도 들어야만 했다. 나는 좀 억울하고 선생님한테 빼놓임을 당하는 듯했다.”(이진명)
“내 깐에는 아주 시다운 시라고 생각되는 교과서 스타일의 상투적인 걸 써 가면, 선생님은 잘 썼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다는 것이냐, 라는 반문을 하셨다. 지금도 생생한 그 억양과 그 이미지로 이제 다시 한번 그 송곳 같은 질문 앞에 서고 싶다.”(최정례)
제자들이 회고하는 대학 시절 강의실 풍경에서 스승인 오규원 시인은 더할 수 없이 엄하고 까다로운 면모로 등장한다. “모두 물방울처럼 투명한 천재들이었”(이창기)던 제자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시와 삶을 대하는 시인 자신의 염결성 때문이었다. 최정례씨의 회고에는 시인이 중앙일보사에서 제정한 미당문학상의 제1회 수상 후보에 올랐으나 △미당의 시는 좋아하지만 작가론의 관점에서 그 이름이 붙은 상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같은 신문사에서 시상하는 소설 부문 황순원문학상 상금이 5천만원인데 시 부문 미당문학상 상금이 3천만원인 점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고사했다는 ‘비화’가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시인은 또한 자상한 아비이기도 했으니, 수업 시간에 아무런 지적을 받지 못해 괴로워한 이진명씨에게는 학생들 사이에서 ‘오규원문학상’으로 불린(오규원 시인이 심사를 맡았으므로) 교지 문학상을 안겼고, 졸업한 뒤에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장석남씨는 따로 불러서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넨다: “너는 시를 잘 쓴다. 네 시는 김종삼과 박용래의 중간 어디쯤이다. 귀중한 자리다. 힘들더라도 잘 견뎌라. 스스로 ‘나는 시를 꽤 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암시를 주도록 해라. 이러저러한 책을 봐라.”
남은 이들의 회고가 제 아무리 안타깝고 절절해도 먼저 간 이는 침묵할 따름이다. 그가 남긴 글만이 고인의 말을 대신한다.
“한없이 투명해지고자 하는 어떤 욕망으로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어디인지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나 아닌 것을 비우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되어 있음은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을 곁에 두고 있으랴.”(<날이미지시에 관하여> 마지막 15장)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윤정(방송작가)씨 제공
강화도 전등사의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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