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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 아이들 죽인 자들은, 더 큰 파멸 경험했으리라

등록 2007-10-21 19:57

욜란데 무카가사나 르완다 작가 투치족 학살 생존자
욜란데 무카가사나 르완다 작가 투치족 학살 생존자
분쟁지역 작가들이 말하는 나의 땅 나의 문학 ① 욜란데 무카가사나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축제 전주서 내달 8일 개막

‘2007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은 국외 문인 80여명과 국내 문인 200여명이 참가하는 초대형 문학 행사다. 2000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열린 ‘서울국제문학포럼’이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초청한 바 있지만, 적어도 규모에서는 이번 대회에 미치지 못한다.

비록 국내에는 덜 알려졌지만 이번에 초청된 문인들 역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각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중국 소설가 모옌과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을 비롯해 팔레스타인 시인 마무드 다르위시, 이집트 소설가 살와 바크르, 보츠와나 시인 바롤롱 세보니, 남아공 소설가 루이스 응코시, 세네갈 소설가 켄 부굴 등이 상대적으로 알려진 작가들이라면, 요르단·방글라데시·아프가니스탄·레소토·베냉·토고·지부티 등 문학적으로는 생소하기만 한 나라의 문인들 역시 초청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국내 문인들은 일일이 거명할 필요조차 없이 주요 문인들이 거의 다 포함되었다.

대회 참가자들은 8일 저녁 개막식과 리셉션에 이어 9~11일 전북대 진수당에서 분과별 기조발제와 집단토론을 벌인다. 디아스포라, 언어, 평화, 여성, 분쟁지역이라는 다섯 분야로 나누어 발표와 토론을 벌인 국내외 문인들은 11일 저녁 ‘전주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공식 행사를 마무리한다. 본대회말고도 ‘젊은 작가 맞장 토론’ ‘문학 카페’ ‘문학 장터’ ‘문학교실’ ‘문예백일장’ 등의 흥미로운 부대행사가 열려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하게 된다.

〈한겨레〉는 대회에 참가하는 외국 문인들 중에서 르완다,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글을 받아 싣는다. 첫회로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종족 갈등을 겪고 있는 르완다의 작가 욜란데 무카가사나의 글을 싣는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종족 학살을 피해 떠나 있던 중이었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당시 일어난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인종 학살이 자행되었다. 대상은 투치족이었다. 그 결과 3개월 동안 무려 100만명이 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대부분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로 살해되었다. 정치 및 군사 집권세력은 투치족 학살에 후투족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죽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과 어린 소녀들에게는 강간을 인종 말살 무기로 사용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동일한 언어, 문화, 영토를 공유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르완다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이전에 모든 르완다인들은 ‘이마나’라는 이름의 같은 신을 섬기고 있었다. 즉 이마나는 모든 르완다인들의 유일신이었다. 모든 이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이마나를 숭배하였다. 그런 가운데 투치족이 별개의 종족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이들을 표적으로 삼아 죽이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식민통치의 산물인 종족을 신분증에 명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식민통치로 르완다 역사가 조작되었기 때문이다. 식민통치 시절 처음으로 르완다인들의 종족을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종족별 신분증이 도입되었다.

르완다가 독립한 1962년 이후 후투족으로 구성된 과격 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13년간 르완다를 통치했다. 이때부터 투치족은 모든 분야에서 배제되었다. 그 후 또다른 반(反)투치 정당이 정권을 이어받아 르완다를 21년 동안 지배했다. 그때부터 투치족 아이들은 기껏해야 초등교육까지만 받았으며 투치족은 정치에 참여할 권리도 공직에 몸담을 권리도 없었다. 또한 군에 입대할 수도 없었다.

투치족을 대상으로 학살이 자행될 때마다 생존자 중 일부는 나라를 떠났다. 투치족은 목숨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도 추방되었던 것이다. 1990년 당시 인접 국가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로 피신한 난민의 수는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들은 르완다로 귀국을 시도하다가 투옥, 살해되곤 했다.

1990년 10월1일 난민의 자녀들이 르완다를 공격하고 국내에 남아 있던 투치족들을 볼모로 잡았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던 집권세력은 국내 거주 투치족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이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 사건은 유엔이 확인한 20세기 마지막 대량 학살이었다. 3개월 만에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살인을 저지른 이들은 바로 군 당국에 협력한 우리의 형제, 부모, 이웃들이었다. 전세계는 이러한 학살 사태를 목도하면서도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집권세력은 언론을 통제하였으며 종족 학살을 위한 자체 언론사들을 설립하였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RTLM(Radio Television Libre des Mille Collines) 방송과 캉구라(Kangura: ‘깨어나라’라는 뜻) 신문을 들 수 있다. 두 언론매체는 후투족을 살인자로, 투치족을 무기력한 피해자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증오를 심는 역할을 담당했다.

1959년 이래 르완다에서 문화는 설 자리를 잃었다. 예술가들은 공연이나 작품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다. 분쟁 중인 국가에서, 게다가 그것도 표현의 자유가 없는 국가에서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해낼 수 없다. 독재 권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의 생산력이 고갈되고 만 것이다.

스무 살 시절 나는 책을 한 권 썼다. 그러나 이내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 책을 행여 출판이라도 하면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아버지가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이후 내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종족 학살을 피해 떠나 있던 중이었다. 죽임을 당하기 전에 당시 일어난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기록을 밑바탕 삼아 르완다에서 발생한 투치족 학살을 다룬 나의 첫 번째 책을 발간할 수 있었다. 제목은 〈죽음은 나를 원하지 않는다〉였다.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는 이는 무엇보다 자기 내면의 인간애를 파괴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파괴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모든 이에게 상처를 남긴다. 살아남은 피해자든 살인자든 간에 말이다. 나의 아이들을 죽인 자는 나보다 더 큰 파멸을 경험했으리라. 나는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늘 침묵을 지켜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용서가 없이는 인간애도 없고 정의가 없이는 용서도 없으며 아울러 인간애가 없다면 정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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