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문화 세계여행’ 전시회 여는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규방문화 세계여행’ 전시회 여는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한 사립박물관이 30여년 전 문을 열어, 소장품만으로 국내 22회, 해외 45회 전시회를 열었다.
소장품전에다 개인전까지 합치니 70여차례. 전시회를 위해 만든 포스터만을 모아 걸으니 또 하나의 번듯한 전시회가 됐다. 강남구 논현동 한국자수박물관에서 3월 5일까지 여는 기획전 ‘규방문화의 세계여행’.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오스트레일리아, 이탈리아, 뉴질랜드, 일본….
30년 넘게 자수·보자기 수집, 박물관 운영
소장품 전시 70여회…본인 작품전도 가져 1976년 허동화, 박원숙 부부가 설립한 한국자수박물관은 자수와 보자기를 중심으로 3천여점의 전통 규방용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자수사계분경도와 수가사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솔직히 자수는 나 아니어도 누군가 수집 보존했을 거요. 하지만 보자기는 내가 아니었더라면 사라져 없어졌을 거요.” 허동화(83·사진) 관장은 말머리에 ‘솔직히’라는 부사를 얹었다. 겸사가 아니라 엄청난 자부심이다. 박물관의 양대 소장품인 자수와 보자기의 질과 양은 자타공인 최고 수준. 자수의 아름다움은 눈에 쉽게 띄어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을 테지만, 보자기의 진가를 일찌기 알아본 이는 자신이고 돈과 시간을 투입해 수집을 하고 나아가 그 가치를 널리 알린 이 역시 자신이라는 뜻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문화예술품으로 도자기, 민화, 보자기를 꼽아요. 도자기와 민화의 가치는 일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바 있지요.” 보자기가 3대 대표예술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공력에서 비롯한다는 말이다. 가족의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한땀한땀에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규중 여인의 소망이 깃들었고 조각마다 가족의 얼굴이 박혀 가족사진을 보는 듯한 정겨운 작품. 외국인들이 몬드리앙이나 끌레에 앞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진 색과 면의 환상적 조화에 넋을 잃는다는 그것. 60년대 말 인사동에서 만난 자수병풍이 규방용품과 첫 인연이다. “남자가 웬 일이냐”는 물음에 그냥 예뻐보이더라고 했다. 수집벽의 그가 자수·보자기에 눈 먼 뒤에는 다른 것은 눈에 차지 않았다. 얼마간 관심을 뒀던 도자기는 모조리 깨버렸다. 치과의사인 아내가 아니었으면 알토란 수집은 불가능했다. 돈이 필요할 때 선뜻 내줬고 급한 김에 아내 금붙이를 들고 나가는 그를 참아줬다. 국립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 종이박물관, 아주대박물관에 수집품을 기증할 때도 선선히 동의했다. 아내 돈으로 생색만 낸 것인가. 그는 “부부가 공동관장이고 부부 사이에 네돈내돈이 어디 있느냐”며 웃었다. 한전에서 상무, 감사 등을 지내며 청렴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 덕이라고 했다. 퇴직 뒤 지방에서 드라이아이스 공장을 운영하면서 수집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공장을 처분했다. 그 돈이 150억원 정도인데 그 동안 사고싶지만 참았던 것을 사들이니 3년 만에 떨어지더라고 했다. 자신의 몫 역시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예술품 수집 30년 눈썰미가 높아진 그는 근년에 작가로 데뷔해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수집품에 딸려온, 깨지고 찢어지고 부러진 고미술품과 농기구, 자재도구 등속으로 구성한 환경조각과, 옛날 천조각과 종이조각을 오리고 찢어붙인 꼴라주 작품. “그동안 돈과 공력이 많이 들었지만 보자기 덕에 누린 명예가 더 큰 것 같아요.”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소장품 전시 70여회…본인 작품전도 가져 1976년 허동화, 박원숙 부부가 설립한 한국자수박물관은 자수와 보자기를 중심으로 3천여점의 전통 규방용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자수사계분경도와 수가사는 보물로 지정돼 있다. “솔직히 자수는 나 아니어도 누군가 수집 보존했을 거요. 하지만 보자기는 내가 아니었더라면 사라져 없어졌을 거요.” 허동화(83·사진) 관장은 말머리에 ‘솔직히’라는 부사를 얹었다. 겸사가 아니라 엄청난 자부심이다. 박물관의 양대 소장품인 자수와 보자기의 질과 양은 자타공인 최고 수준. 자수의 아름다움은 눈에 쉽게 띄어 알아보는 사람이 나왔을 테지만, 보자기의 진가를 일찌기 알아본 이는 자신이고 돈과 시간을 투입해 수집을 하고 나아가 그 가치를 널리 알린 이 역시 자신이라는 뜻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3대 문화예술품으로 도자기, 민화, 보자기를 꼽아요. 도자기와 민화의 가치는 일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바 있지요.” 보자기가 3대 대표예술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사실 자체가 자신의 공력에서 비롯한다는 말이다. 가족의 옷을 짓고 남은 자투리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한땀한땀에 가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규중 여인의 소망이 깃들었고 조각마다 가족의 얼굴이 박혀 가족사진을 보는 듯한 정겨운 작품. 외국인들이 몬드리앙이나 끌레에 앞서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만들어진 색과 면의 환상적 조화에 넋을 잃는다는 그것. 60년대 말 인사동에서 만난 자수병풍이 규방용품과 첫 인연이다. “남자가 웬 일이냐”는 물음에 그냥 예뻐보이더라고 했다. 수집벽의 그가 자수·보자기에 눈 먼 뒤에는 다른 것은 눈에 차지 않았다. 얼마간 관심을 뒀던 도자기는 모조리 깨버렸다. 치과의사인 아내가 아니었으면 알토란 수집은 불가능했다. 돈이 필요할 때 선뜻 내줬고 급한 김에 아내 금붙이를 들고 나가는 그를 참아줬다. 국립중앙박물관, 민속박물관, 종이박물관, 아주대박물관에 수집품을 기증할 때도 선선히 동의했다. 아내 돈으로 생색만 낸 것인가. 그는 “부부가 공동관장이고 부부 사이에 네돈내돈이 어디 있느냐”며 웃었다. 한전에서 상무, 감사 등을 지내며 청렴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아내 덕이라고 했다. 퇴직 뒤 지방에서 드라이아이스 공장을 운영하면서 수집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공장을 처분했다. 그 돈이 150억원 정도인데 그 동안 사고싶지만 참았던 것을 사들이니 3년 만에 떨어지더라고 했다. 자신의 몫 역시 만만치 않다는 말이다. 예술품 수집 30년 눈썰미가 높아진 그는 근년에 작가로 데뷔해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수집품에 딸려온, 깨지고 찢어지고 부러진 고미술품과 농기구, 자재도구 등속으로 구성한 환경조각과, 옛날 천조각과 종이조각을 오리고 찢어붙인 꼴라주 작품. “그동안 돈과 공력이 많이 들었지만 보자기 덕에 누린 명예가 더 큰 것 같아요.”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