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49)
이승우 새 소설집 ‘오래된 일기’
오래된 일기
소설의 기원·독자의 발견 같은
메타소설적 주제 툭툭 건드려 작가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 독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승우(49)씨의 아홉 번째 소설집 <오래된 일기>(창비)는 소설의 기원과 독자의 발견 같은 메타소설적 주제를 건드린다. 표제작에서 주인공인 소설가 ‘나’는 동갑내기에 생일까지 같은 사촌 규가 중병에 걸려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는다. 회생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규의 처참한 몰골 앞에서 나는 문학 지망생이었던 규가 아니라 자신이 소설을 쓰게 된 저간의 사정을 돌이켜 보며 알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든다. 대학에도 가지 못한 채 습작을 하던 규는 결국 문학을 포기하고 불안정한 생을 살아 왔다. 규가 꿈꾸었던 대학과 문학은 오롯이 나의 몫이 되었다. 까만 얼굴과 복수가 차 팽팽하게 부풀어오른 배를 한 채 병상에 누워 있는 규를 보며 나는 지나간 청춘의 어느 날 술에 취한 규가 “나에게 안 미안한가?” 주정하듯 내뱉었던 말을 떠올린다. 물론 나가 규의 대학 진학을 막거나 문학을 훼방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글을 쓰면서 “규가 이 문장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를 늘 생각했다”는 구절은 나의 글쓰기의 저변에 규를 향한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려 준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또 다른 단편 <방>에서도 그의 글쓰기를 추동하는 것은 역시 죄의식인 것으로 나타난다. 집이 없어 연립주택 계단에 짐짝처럼 쓰러져 자고 있는 노인을 모른 척 스쳐지나갔던 일, 치매에 걸린 큰어머니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갔던 일 등 “그런 것들이 글이 되었다.” 비록 소설가가 나오지는 않지만, <실종 사례>에서도 채권과 채무가 복잡하게 뒤얽힌 관계를 이야기로 풀어내고(“그는 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나는 듣기 힘든 말을 들었다.”)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주인공의 모습은 소설의 기원으로서의 부채의식에 대해 말해 주는 바가 있다 하겠다. 표제작은 또한 독자의 역할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나가 등단하게 된 것은 그의 습작 원고를 규가 몰래 훔쳐 가서 잡지에 응모한 때문이었다. 그 뒤 나는 글을 쓸 때 늘 규의 반응을 의식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내 문장의 첫번째 독자였다. (…)내 문장은 자주 그가 원하는 대로 씌어졌다. 독자는 사실상의 작가였다.” 문학에 뜻을 두었던 것은 나보다는 규가 먼저였다. 규가 쓴 습작 원고를 보고 “나는 제법 성실하게 독후감을 이야기해줬다.” 그런데 이제 와서 쓰는 자와 읽는 자의 역할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말로 바뀐 것일까. ‘나’는 독자가 사실상의 작가였노라고 밝히고 있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오면 독자와 작가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게 한 몸으로 엉킨 존재임이 뚜렷해진다. 독자의 역할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인식은 <전기수 이야기>에서 만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꾼 전기수처럼 고객의 의뢰를 받고 찾아가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해 주던 주인공은 어느 순간 화자와 청자의 역할이 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져든다. “듣는 그를 위해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나를 위해 그가 들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식의 도착이 종종 찾아왔어.” 이 작품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그’는 마침내 제 안에 가두어 두었던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를 토해낸다. 독자가 작가가 된 것이다.
이승우씨의 소설은 매우 관념적이며 때로 난해하다는 평가를 들어 왔다. 이번 소설집은 상대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에 충실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구조조정과 실업, 기러기 아빠와 가족 해체 같은 동시대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는가 하면 대구 지하철 방화 같은 사건도 등장한다. 관념의 껍질을 벗고 현실에 밀착한 이런 변모가 앞서 살펴본바 독자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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