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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팔리는 인문학, 소비되는 인문학

등록 2009-11-06 20:25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요즘은 ‘인문학 열풍’이라는 말이 떠돈다. 큰 대학이나 지자체, 문화 기관이나 단체들에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어서 과연 새로운 기풍이 진작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찌하여 위기가 열풍으로 순식간에 변한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개인적으로 ‘인문학 강좌’를 바탕으로 한 문화 단체 일을 7년 넘게 해오다가 그만 작년 이맘때 안팎의 여러 사정으로 인하여 사업 자체를 접게 된 뼈아픈 경험이 있는 까닭에 요즘의 열기가 더욱 궁금한 것이다.

인문학 열기는 비단 시민강좌뿐만 아니라 출판이나 그 밖의 사회 행위에도 번지고 있다. 기업 경영이나 광고 개발에 관한 책에도 인문학이 신묘한 수식어로 쓰인다. 그러한 제목을 단 책들을 일별해 보니 기업 경영이나 처세술의 새 돌파구를 열어젖힌 내용을 딱히 찾아보기 어렵고 인문학이라는 수식어가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인문학이 바야흐로 세상살이의 척도처럼 대접받고 있는 것 자체는 반가운 일이다. 적자생존의 피어린 전투를 실감나게 하는 냉정한 처세술보다는 최소한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정도의 덕목만큼은 제시해 놓은 책들이니 한결 보기에 좋긴 하다.

그럼에도 요즘의 인문학 열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몇 해 동안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 원리(효율과 경쟁)에 따라 전면적으로 해체·재구성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내면은 살벌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산산히 파괴되기 시작했으며 누구에게나 가능할 법했던 중산층의 꿈 또한 여지없이 뭉개지기 시작했다. 이 쓰디쓴 서바이벌 전투에 어린 자녀들까지 합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자연스레 내면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으며 이것이 기본적으로 인문학 열기의 파토스가 되었다. 수많은 인문학 강좌와 독서 특강과 철학 모임은 이 절박한 요구에 기반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문학 열기의 공간적인 특성 또한 살펴봐야 한다. 1990년대 이후 크고 작은 도시들마다 대규모 문화 시설이 들어섰다. 요즘의 인문학은 바로 이런 대규모 시설 안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오래전부터 각 지자체나 기관은 시민의 ‘여가 선용’을 위한 교양 강좌를 실시해왔다. 꽃꽂이나 노래 배우기 같은 취미·실용강좌가 꽤 오랫동안 각 지자체의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 새롭게 들어선 최신 시설과 이런 강좌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이런 프로그램의 수용자층이 점차 노령화되기 시작하였고 상대적으로 젊은 층의 실용적인 욕망이나 미학적인 수준과는 어울리지 않게 된 점도 있다. 아이들에게 양질의 책을 골라주려고 큰 서점이나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는 요즘의 30, 40대 젊은 엄마와 아빠들이 기존의 취미·실용강좌를 찾아나서지는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꽤 많은 강좌들이 대체로 ‘당대성’이 생략된 일반 교양 강좌라는 측면이 강하다. 과거의 중산층 문화에 대한 욕망이 꽃꽂이나 노래교실로 드러났다면 이제 신중산층 문화의 한 유행으로 인문학 강좌가 이쁘장하게 ‘뽀삽질’되어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에서 마련하는 강좌 역시 같은 맥락에서 걱정해야 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대학이 인문학의 산실인가 하는 질문은 요즘의 풍경에서 우문이 되고 있다. 밤새워 연구에 매진하여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궁극적인 해답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면모는 소수의 교수와 학생들이 간신히 빚어내는 최후의 보루일 뿐이다. 박용성 이사장이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는 중앙대의 사례가 잘 보여주듯이, 일부 대학의 풍경은 인문학의 산실이 아니라 그처럼 ‘현실성’ 없는 것은 과감히 생략하고 ‘생산성’만을 최고의 가치로 제시하는 경쟁 문화가 창궐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학이 특정 계층이나 지역 주민들을 향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 이 자체만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실은 적지 않은 수익 발생과 특정 계층의 커뮤니티라는 사회문화적 자본의 형성으로 귀결되는 일이 되기 쉽다. 지역 주민을 위한 인문학 강좌 또한 명망 높은 인사들의 연속 특강일 뿐 특정 주제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유의해야 할 것은 이 열풍이 헛헛한 마음을 근사한 말로 잠시 채우는 일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대성’이라는 화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저 들으면 좋고 안 들어도 무방한 한가로운 강좌가 아니라 오늘의 이 불안하고 경쟁적인 삶을 제대로 응시할 수 있는 관점이 녹아 있는 강좌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많은 강좌를 듣고 났을 때 오늘 이 시대의 많은 문제들이 바로 자신의 실존적 불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며 그때에 비로소 더 많은 공부와 성찰을 위해 밤늦도록 책을 읽게 될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인문학 열풍이 제대로 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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