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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연인’ 누구를 꼽지?

등록 2005-06-22 17:46수정 2006-03-23 16:26

스토커 아닌 팬으로 짝사랑했던 스타는 밤하늘 별만큼 많았는걸

‘스크린 속 나의 연인’을 한 명 꼽자니 그리스 신화 속의 파리스가 된 기분이다. 곤혹스러우면서 동시에 우쭐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흠…, 중학교 때 좋아했던 소피 마르소로 할까? 아니면 최근 들어 좋아하는 스칼렛 요한슨으로 할까? 아니지. 우리나라 배우도 많은데 왜 외국 배우를 꼽아? 고두심으로 할까? 김태희로 할까? 잠깐, 그러고 보니 김태희가 배우던가?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가끔 보기는 했는데 연기하는 것은 통 본 기억이 없는 걸?’

나는 한 명을 꼽기 전에 스스로 몇 사람으로 분열하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책상머리에 앉아 일은 안하고 여인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세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했는지 아내가 한 수 거든다.

“책에다가는 올리비아 뉴튼 존이 좋다고 썼잖아, 그새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

며칠 전에 나온,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해 쓴 수필집을 보고 하는 소리다.

“에이, 한번 쓴 사람을 또 써?”

“어머나? 좋아하는 스타가 그럼 맨날 바뀌어? 바람둥이 같으니라고!”

바람둥이라고? 어차피 보통 사람들은 스타를 일방적으로 흠모하고 그러다가 제풀에 지쳐 또 다른 스타로 옮겨가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스타를 한 명 찍어 죽도록 좋아하면 그게 스토커지 팬이냔 말이다. 몇 년 전에 이런 경험을 했다.

주간 영화잡지(21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잡지라는 것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에 만화를 하나 그렸는데 고소를 당한 일이 있다. 담당기자와 편집장과 나, 이렇게 셋이 고소를 당했다. 별 내용 아니었는데 기분이 나빴던 독자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이 몹시 상해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조사를 받으러 불려갔는데, 정작 조사하는 사람은 아주 친절하고 여유롭게 진술서를 작성했다.

“아, 그러니까 개인을 모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럼요. 보시다시피 입니다.”

한 이삼십 분 그러고 있는데 옆 자리에 차림새가 남루한 아가씨가 들어와 앉았다. 얼핏 보니 수갑까지 차고 있었다. 잠시 후 그를 담당한듯한 조사관이 호통을 친다.

“그러니까, 김미숙씨네 집에 왜 또 갔어?”

아, 그는 영화배우 김미숙씨를 스토킹 한 죄로 붙잡혀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쪽은 조용조용한데 반해 그 쪽은 제법 분위기가 살벌했다. 나는 덩달아 잔뜩 겁먹은 채로 그와 조사관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나를 담당한 조사관도 나를 조사하는 것은 대강대강이고 옆으로 완전히 몰두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요점은, 그는 김미숙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데, 보고 싶은데 어쩌란 말이냐? 그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대해 써달라고 기자가 당부를 했는데, 엉뚱한 경험담을 늘어놓고 말았다. 억지로 마무리를 하자면, 누구 하나 꼭 집어 스토킹 할 정도로 좋아했던 스타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진을 책받침으로 코팅해 수업시간에 들여다 볼 정도의 스타는 밤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우일/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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