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미고 섞여 잡종음악 태어납니다”
라디오 음악PD. 영화 <접속>에서 한석규가 맡았던 역할이나 <겨울연가>에서 ‘준상’의 연적 ‘상혁’을 참고해보자. 빡빡한 경쟁사회 속에서도 당당히 제 나름의 경계를 세워 전문성을 인정받는 직업인이자 개인적 고상한 취미와 감수성을 살려나가는, 참으로 부러운 직종 아닌가.
10년 가까이 음악프로만 맡아
음반 300여장 리뷰 한권에
“인기곡 반복·특정곡 밀기가 음악의 위기 가져왔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직업을 두고, CBS라디오의 심영보(43) 프로듀서는 “음악PD가 인기곡만 반복하고 광고 곡을 마구 틀고 특정 곡 밀기 등에 편승함으로써 음악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준엄하게 자성한다. 89년 CBS에 입사한 뒤 주로 교양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그는 96년 팝 프로그램 ‘저녁스케치’를 맡으면서 음악을 ‘알게’ 됐다. 물론, 이전에도 음악은 부대끼는 마음의 ‘마지막 위로제’였다. 사춘기 병을 심하게 앓아 휴학까지 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 우울하고 내성적인 그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스메타나의 교향시 <몰다우> 2곡만을 3년 내내 들었다. “그나마 비틀즈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우연히 새벽에 라디오에서 ‘렛잇비’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에요. 하하.” 예전엔 음악을 마음으로만 들었지만 음악PD는 머리를 동원해 귀를 훈련시켜야 했다. ‘저녁스케치’ 이후 운 좋게도 그는 CBS의 대표적인 음악전문 프로그램을 섭렵해간다. ‘이정식의 0시의 재즈’, ‘서남준의 월드뮤직’. 그렇게 한바퀴 돌아 요즘 그는 ‘저녁스케치’를 다시 맡고 있다. 10년 가까이 음악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그는 음악PD의 소명이란 다양한 반찬을 맛깔스럽게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자연스레 ‘공부’에 빠져들었다. 심 PD가 최근 펴낸 <월드뮤직:세계로 열린 창>(해토 펴냄)은 5년 음악공부의 총결산과도 같은 책이다. 535쪽에 이르는 두툼한 부피에 300여장의 음반 리뷰를 담았다. 그야말로 월드뮤직의 기본 교과서다. 이 책은 월드뮤직의 장르와 특성을 12가지 열쇠말로 분류해 소개해 놓았다. 가령 그리스 밑바닥 인생들의 노래였던 렘베티카,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개척에서 탄생한 파두, 남미의 ‘파리’로 불리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겨난 격정의 음악 ‘탱고’ 등을 ‘항구는 노래를 만든다’는 주제로 묶는 식이다. 그는 월드뮤직에는 ‘순혈주의’가 없다고 말한다. “혼혈·전쟁·이민 등으로 사람이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그 와중에 이를 뭉뚱그려 선율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잡종음악이 탄생합니다. 월드뮤직은 문화의 혼융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앞으로 젊은 국악인과 재즈뮤지션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음악을 ‘월드뮤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음악의 재료를 공급하는 국악인과 자유분방한 주법을 구사하는 재즈 연주자들이 만난다면, 뿌리 없는 대중음악의 난립, 전통의 단절과 같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심 PD가 지난해 CBS 공개 음악회를 기획하며, 이정식씨와 젊은 국악인들이 함께 연주를 하는 무대를 마련했던 것도 이런 기대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 대목에서, 음악PD의 역할은 음악의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소리 코디네이터’가 된다. 작곡가만 소리를 생산하는 게 아니다. 글·사진 이유주현기자 edigna@hani.co.kr
음반 300여장 리뷰 한권에
“인기곡 반복·특정곡 밀기가 음악의 위기 가져왔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직업을 두고, CBS라디오의 심영보(43) 프로듀서는 “음악PD가 인기곡만 반복하고 광고 곡을 마구 틀고 특정 곡 밀기 등에 편승함으로써 음악의 위기를 가져왔다”고 준엄하게 자성한다. 89년 CBS에 입사한 뒤 주로 교양프로그램을 제작했던 그는 96년 팝 프로그램 ‘저녁스케치’를 맡으면서 음악을 ‘알게’ 됐다. 물론, 이전에도 음악은 부대끼는 마음의 ‘마지막 위로제’였다. 사춘기 병을 심하게 앓아 휴학까지 해야 했던 고등학교 시절, 우울하고 내성적인 그는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과 스메타나의 교향시 <몰다우> 2곡만을 3년 내내 들었다. “그나마 비틀즈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우연히 새벽에 라디오에서 ‘렛잇비’가 흘러나왔기 때문이에요. 하하.” 예전엔 음악을 마음으로만 들었지만 음악PD는 머리를 동원해 귀를 훈련시켜야 했다. ‘저녁스케치’ 이후 운 좋게도 그는 CBS의 대표적인 음악전문 프로그램을 섭렵해간다. ‘이정식의 0시의 재즈’, ‘서남준의 월드뮤직’. 그렇게 한바퀴 돌아 요즘 그는 ‘저녁스케치’를 다시 맡고 있다. 10년 가까이 음악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그는 음악PD의 소명이란 다양한 반찬을 맛깔스럽게 내놓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자연스레 ‘공부’에 빠져들었다. 심 PD가 최근 펴낸 <월드뮤직:세계로 열린 창>(해토 펴냄)은 5년 음악공부의 총결산과도 같은 책이다. 535쪽에 이르는 두툼한 부피에 300여장의 음반 리뷰를 담았다. 그야말로 월드뮤직의 기본 교과서다. 이 책은 월드뮤직의 장르와 특성을 12가지 열쇠말로 분류해 소개해 놓았다. 가령 그리스 밑바닥 인생들의 노래였던 렘베티카, 포르투갈 해외 식민지 개척에서 탄생한 파두, 남미의 ‘파리’로 불리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생겨난 격정의 음악 ‘탱고’ 등을 ‘항구는 노래를 만든다’는 주제로 묶는 식이다. 그는 월드뮤직에는 ‘순혈주의’가 없다고 말한다. “혼혈·전쟁·이민 등으로 사람이 섞이고 문화가 섞이고 그 와중에 이를 뭉뚱그려 선율과 리듬으로 표현하는 잡종음악이 탄생합니다. 월드뮤직은 문화의 혼융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앞으로 젊은 국악인과 재즈뮤지션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음악을 ‘월드뮤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음악의 재료를 공급하는 국악인과 자유분방한 주법을 구사하는 재즈 연주자들이 만난다면, 뿌리 없는 대중음악의 난립, 전통의 단절과 같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심 PD가 지난해 CBS 공개 음악회를 기획하며, 이정식씨와 젊은 국악인들이 함께 연주를 하는 무대를 마련했던 것도 이런 기대가 있었던 까닭이었다. 이 대목에서, 음악PD의 역할은 음악의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소리 코디네이터’가 된다. 작곡가만 소리를 생산하는 게 아니다. 글·사진 이유주현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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