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의 앎과 함
지금이 전환기라는 것은 인류가 신자유주의 파탄과 함께 근현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근현대의 기간은 나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서유럽 나라들에서는 16세기까지 소급된다는 게 정설이고, 동아시아의 경우 서세동점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세기 초중반부터 잡으면 200년 가까이 된다. 어떤 조건에서 근현대를 맞았는지도 나라에 따라 크게 다르다. 이렇듯 기간과 여건은 각각이지만 모든 나라의 근현대에 공통되는 몇 가지 큰 흐름이 있다. 이를 ‘근현대의 세 가지 기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국가와 계급체제라는 괴물을 어떻게 길들여 다수 국민 또는 민중에게 봉사하도록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다. 근현대에 와서 지구촌 곳곳에서 있었던 많은 혁명과 개혁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갖가지 체제 실험이 이뤄지고 새로운 정치·사회 질서가 만들어졌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발전은 이 과정에서 획득한 소중한 성과다.
둘째는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아 앞서갈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민족국가는 이 목표에 잘 들어맞는 고안물이었다. 패권국의 존재와 세력균형을 핵심 요소로 하는 근현대 국제체제는 그 무정부성 때문에 민족국가를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국가의 정통성은 흔히 다른 나라와의 경쟁 구도를 통해 표출됐고, 이는 근현대를 이끌어나가는 중요한 동력의 하나가 됐다.
셋째는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자신과 세계의 주체로서 개개인의 역량을 키우겠다는 시도다. 이와 관련해 자본주의 체제는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유효한 답을 내놓았다. 실질소득으로 지금 인류의 삶의 질을 평가해보면 근현대 초기와 비교해 적어도 수십배 높아졌다. 세계 인구가 19세기 초반에 비해 7배까지 늘어난 것은 인간이라는 종이 근현대에 와서 얼마나 성공을 거뒀는지를 뚜렷이 보여준다.
하지만 근현대는 그 화려한 성공만큼이나 한계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계급 없는 자애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급진적 열정은 스탈린식 공산주의라는 또다른 괴물을 낳았고, 공산권 붕괴는 그 실험이 실패했음을 보여줬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지금도 수시로 돌출하는 파시즘적 경향 또한 민주주의가 쉽게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근현대 국제체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각종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근현대가 확산시킨 각종 제국주의 행태들도 여전히 힘을 잃지 않고 있다. 10년 동안 계속되는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현 국제체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최근의 예일 뿐이다.
근현대의 기획은 역사적으로 타당했고 많은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봉우리가 높으면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근현대의 기획들은 이미 창조적 힘을 잃고 있다. 나아가 인류는 지금 기후변화·에너지·인구·식량·전염병과 새로운 형태의 분쟁 등 자신이 만들어낸 심각한 지구 차원의 문제들을 안고 있다. 이제 어떤 기획이 필요하며 어디서 동력을 얻을 것인가.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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