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콘텐츠평가실장
김지석의 앎과 함
얼마 전 열린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는 우리나라가 개발도상국들한테 얼마나 주목받는 위치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행사였다. 이번 회의는 ‘원조효과성’을 앞세웠던 이제까지 논의의 초점을 ‘개발효과성’으로 이동시킨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개발(발전)은 원조의 활용을 포함해 어떤 국가 또는 지역 주민의 생활 여건을 총체적으로 개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개발협력 분야의 올림픽이라는 이 회의를 유치한 것을 계기로 ‘한국형 개발’ 경험을 다른 개도국에 전수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개도국들이 가장 선호하는 발전 모델의 하나다. 불과 한 세대 만에 원조를 받는 최빈국에서 원조를 주는 선진공여국(경제협력개발기구 개발원조위원회 회원국)이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개발독재라는 아픈 상처는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형 개발 자체가 보편성을 가지기는 어렵다.
어떤 사회가 개발에 성공하려면 자본과 시장, 인력, 전략 등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우리나라는 개발 초기에 외국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전체 지원액 가운데 90% 정도가 미국과 일본에서 왔다. 또한 미국은 냉전 동맹국이라는 전략적 이유로 큰 거부감 없이 한국 수출품의 주된 시장이 됐다. 역사적인 특수성이 한국형 개발의 기본 조건이 된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도 산업·계층간 불균형과 대외의존 구조 등 개발시대의 부정적인 유산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인력과 전략 등을 뼈대로 한국형 개발모델을 내세울 수는 있겠지만 이 또한 다른 개도국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형 개발을 포함한 동아시아발전모델은 국가가 기간산업 형성과 경제 관리 등에서 핵심 구실을 하는 국가자본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나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생산력 향상에서 일정한 성과를 낼 경우 이후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는 민주화다. 민주화의 수준과 내용에 따라 발전 형태와 국가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민주화 정도가 낮을 때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가기 쉽다. 히틀러의 독일 나치 정권과 2차대전 이전 일본의 군국주의 정권이 그런 사례다. 반면 시민사회가 활성화하고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자리잡는다면 국가자본주의는 사회민주주의로 진화하기 쉽다. 북유럽 나라들과 2차대전 이후의 독일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시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사회에서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수정 자본주의가 나타난 것과 대비된다.
나라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는 동아시아발전모델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 후반 아이엠에프 위기를 계기로 이 모델에서 벗어나 신자유주의 체제로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행경로를 보이게 된 이유로는 민주주의 역량의 부족, 당시 신자유주의의 거센 공세, 정권 주도세력의 안이한 인식 등을 꼽을 수 있다. 이후 10여년간 우리나라는 큰 사회·경제적 비용을 치렀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체제 대안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동아시아발전모델의 모습도 우리나라가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콘텐츠평가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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