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부천시 상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한국만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추억의 만화방을 재현한 모습. 부천/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②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추억 어린 ‘만화방’ 공간 재현
만화도서관·영상열람실 운영
아동실 갖춰 가족 단위 방문도
비즈니스센터엔 작가·업체 입주
디지털 출판 등 사업모델 의욕
②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추억 어린 ‘만화방’ 공간 재현
만화도서관·영상열람실 운영
아동실 갖춰 가족 단위 방문도
비즈니스센터엔 작가·업체 입주
디지털 출판 등 사업모델 의욕
어렸을 적, 어른들은 만화를 못 보게 했다. 탈선의 온상이라도 되는 양 몰아세웠다. 그래도 아이들은 만화를 봤다. 몰래 만화방에 갔고, 용돈을 모아 만화잡지를 샀다.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넘기던 책장을 상상의 나래 삼아 날아올랐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지자체가 돈을 들여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을 진흥하는 기관까지 만들었다. 만화·애니메이션 산업은 즐거움도 주고 돈도 버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달 21일 경기도 부천시 상동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찾았다. 부천시가 1998년 설립한 부천만화정보센터가 2009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진흥원 청사 바로 옆에 한국만화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만화 1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곳이다.
1층 매표소를 지나 3층 기획전시실에 가니 ‘만화, 문화재가 되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국내 최초 단행본인 김용환 작가의 <토끼와 원숭이>(1946), 최초의 만화 베스트셀러인 김종래 작가의 <엄마 찾아 삼만리>(1958), 최장기간 연재 기록을 갖고 있는 김성환 작가의 <고바우 영감>(1955~2000) 등 3편이 지난해 2월 만화로는 처음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걸 기념하는 전시회다. 만화도 문화재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문득 한국 최초의 만화가 궁금해졌다.
기획전시실을 나와 상설전시실에 가니 궁금증이 바로 풀렸다. ‘한국만화, 100년을 날다’라는 제목을 새긴 입구가 반겨주었다. 곧바로 1909년 <대한민보> 창간호에 실린 이도영 화백의 시사만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근대 한국만화의 효시가 되는 작품이다. 전시장을 따라가니 시대별 만화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 시사만화, 어린이만화, 만화잡지 등이 본격적으로 생겨났고, 50년대 후반 생겨난 만화방이 6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독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만화방의 대여 시스템은 산업 기반을 약화시키는 부작용도 낳았다.
추억의 힘은 셌다. ‘땡이네 만화가게’라는 간판을 단 만화방을 재현한 공간은 발길을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들어가보니 <라이파이>(산호), <그림자 땡이>(임창), <도전자>(박기정), <약동이와 영팔이>(방영진) 등 만화책들이 책장에 늘어서 있었다. 한편에는 라면, 음료수, 빵, 담배 등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만화방에서 해치운 짜장면과 라면이 몇 그릇이던가. 요즘은 이런 만화방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1980년대는 한국만화의 르네상스로 일컬어진다. <공포의 외인구단>(이현세) 같은 ‘국민만화’들이 쏟아졌고, <아기공룡 둘리>(김수정)가 연재된 <보물섬> 같은 만화잡지들도 잇따라 창간됐다. 전시실 한편에 <보물섬>을 비롯해 <아이큐점프> <챔프>,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았던 순정만화잡지 <르네상스> <댕기> 등을 사람보다 크게 만든 모형들이 세워져 있었다.
2000년대 들어 ‘웹툰’이라 불리는 디지털 만화가 등장했다. 포털사이트에 연재된 강도하의 <위대한 캣츠비>, 강풀의 <순정만화>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면서 웹툰이 만화의 대세가 됐다. 하지만 전시회에선 웹툰이 현재 만화산업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해 관련 전시물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였다. 웹툰의 성장세가 현재진행형인데다, 아무래도 박물관의 성격상 출판만화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전시실을 나와 2층으로 내려오니 국내 최대 규모의 만화도서관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영상열람실은 당일 방문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많았는데, 미국의 디즈니·픽사 작품이나 <명탐정 코난> 같은 일본 작품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아직까진 크게 빛을 못 보고 있는 국내 애니메이션의 현주소를 보는 듯했다.
중학생 이상 이용할 수 있는 일반열람실은 ‘만화방’의 확장판이었다. 커다란 도서관에서나 봄 직한 책꽂이마다 만화책들이 가득했다. 드라마, 로맨스, 공상과학, 판타지, 스포츠 등 장르별로 분류돼 있었는데, 한국만화뿐 아니라 <슬램 덩크> 같은 일본만화도 많았다. 대여는 안 되고 열람만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곳곳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책장을 분주히 넘겼다. 주정민(45)씨는 “중학생 때부터 만화가게를 다니며 허영만, 고행석, 박봉성, 이현세 등의 만화를 즐겨봤는데, 요즘은 그런 만화를 볼 곳이 잘 없다”며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여기 와 만화를 즐기고 있다”고 말했다.
아동열람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매트를 깔고 놀이방 같은 분위기로 꾸며놓았다. 바닥에 배를 깔고 <메이플스토리>를 보던 이수연(9)양은 “함께 온 엄마, 아빠는 일반열람실로 가셨고, 나는 여기서 만화를 보고 있다”며 “가족이 함께 오니 더 즐겁다”고 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만화를 무조건 못 보게 하는 건 이제 옛날얘기가 된 듯했다.
한국만화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박물관을 나와 맞은편 진흥원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의 만화비즈니스센터에는 116명의 입주 작가와 16개 만화 관련 기업체가 들어와 있다. 시대상을 반영해선지 출판만화와 웹툰의 비율이 절반가량씩이라고 한다. 임대료가 싼데다 수면실, 샤워실, 회의실 등 편의시설도 갖추고 있어 입주 경쟁률이 치열하다.
포털사이트 연재 웹툰 <목욕의 신>으로 유명한 하일권 작가는 2009년 이곳이 생겼을 때 입주해 계속 이곳에서 일한다. 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선후배 6명이 팀을 짜서 공동작업실을 얻었다. 하 작가는 “출판만화는 집단작업이지만, 웹툰은 대부분 개인작업이기 때문에 집에서 작업하면 외롭다”며 “이곳에 오면 다른 작가와 소통하며 피드백도 얻고 외로움도 덜 타서 좋다”고 말했다. 그는 근처에 집을 얻어 출퇴근을 하고 있다.
<목욕의 신>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요즘 히트한 웹툰은 영화, 드라마 등의 원작 콘텐츠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2008~2009년 포털사이트에 <창 위의 일루젼>을 연재했던 시우 작가(<신의 탑>을 그린 SIU 작가와 동명이인) 역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만화도서관에서 만난 그는 “내가 직접 출판사가 돼 애플리케이션 등을 통해 일본에 디지털 출판을 하는 사업 모델을 개발중”이라며 “무료로 만화를 보는 포털사이트 기반을 넘어 새로운 유료 모델이 계속 나와야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대를 뛰어넘은 소비자와 창작자들이 어우러지는 부천의 이 공간엔 한국만화의 어제와 오늘뿐 아니라 미래가 꿈틀대고 있었다.
부천/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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