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부터 한반도 특산품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황금빛 희귀 도료 ‘황칠’을 실은 통일신라 교역선의 실물이 사상 처음 실체를 드러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2년 인천 옹진군 영흥도 부근 바닷속 펄 바닥에서 인양한 고대 교역선(영흥도선)의 뱃조각과 안에 실렸던 유물들을 정밀분석한 결과 7~8세기 통일신라 배로 판명됐다”고 17일 <한겨레>에 밝혔다. 2012년 발굴돼 공개될 당시 영흥도선은 길이 6m, 너비 1.5m 크기의 3단으로 된 선체 외판 조각 등이 쇳녹 등 부식물로 덮인 채 인양됐다. 그 뒤 충남 태안 신진도에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태안보존센터로 옮겨져 정밀분석과 보존처리 작업을 벌여왔다. 분석 결과 이 뱃조각은 고려 배와 단면이 다르고, 통일신라 특유의 선박제작 기법인 나무못으로 부재를 잇는 방식을 써서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문화재청 쪽은 “펄 바닥에 고려청자 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어 애초 고려 배로 추정했으나, 연륜연대·탄소연대측정 결과 7~8세기로 나왔다”며 “제작 방식이 70년대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신라 배와 같으며, 배 안에 고려청자가 전혀 없었던 것 등도 (신라 배로 판명한) 근거가 됐다”고 설명했다.
2006년 경주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안에 굳은 상태로 확인된 황칠 덩어리.
신라 교역선이 바닷속에서 확인된 것은 한국 수중고고학과 신라 해상활동사 연구에 획을 긋는 성과다. 경주 월지에서 신라 배가 나왔지만, 작은 유람선으로 추정돼 당시 교역선 원형을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학계에서는 경주 인근 울산항 등에서 중국과 서남해안 각 지역의 교역과 세곡 수송을 위해 숱한 신라 배가 출항했을 것으로 추정해왔지만, 연안 바다에서 신라 배 실물이 나온 적은 없었다. 해상왕 장보고가 전라도 완도 청해진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9세기 전반과는 지리적·시기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미지에 싸인 장보고 선단의 형태 등을 연구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더욱이 뱃조각뿐 아니라 황칠 등의 주요 선적품까지 다수 확인돼 수중고고학의 지평이 신라까지 확대되는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유물들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선적된 토기에 들어 있는 황칠이다. 황칠은 배를 뒤덮은 쇳녹덩어리 속에서 나온 작은 광구소호(넓은 주둥이를 지닌 작은 항아리) 토기병 안에 들어 있었다. 갈색으로 일부 변색되기는 했지만, 끈적거리는 원래의 액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문화재청 쪽은 “토기에 뚜껑이 닫혀 밀폐된 덕분에 여전히 은은한 향과 끈적끈적한 유기물 상태를 지속할 수 있었다. 성분 분석 결과 현재 황칠 도료 성분과 80% 정도 일치한다”고 전했다.
황칠은 한반도 서남해안 완도, 보길도 등지에 자생하는 황칠나무 수액을 짜서 가공한 도료다. 일찍이 고대 중국 등에서 황금빛을 띠며 내구성이 뛰어난 최고의 도료로 널리 칭송받았고, 부와 권위의 상징으로 고급 갑옷, 장식품 등에 칠했다. <책부원구> <구당서> 등에 ‘당 태종이 백제에 갑옷에 입힐 금칠을 청했다’ ‘백제 섬에서는 황칠 수액이 생산된다’는 대목 등이 보인다. 백제가 ‘명광개’라는 고급 갑옷을 당나라에 선물했다는 기록도 <삼국사기>에 전하는데, 이 갑옷에도 황칠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실체를 몰랐던 신비의 착색 재료로 이름만 전해지다가, 2006년 경주 첨성대 인근의 제사터 유적 지하에서 딱딱하게 굳은 황칠 덩어리가 들어 있는 토기가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유기 성분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를 지닌 채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통 황칠 도료의 제작법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전승이 끊어진 상황이어서, 향과 유기적 상태가 살아있는 신라산 황칠 도료의 발견은 앞으로 황칠 재현을 위한 유력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배 안에서는 이외에도 12개나 되는 쇠솥과 가공 흔적이 남은 목제품, 장군병 등의 다양한 도기, 토기, 사슴뿔 등이 나온 것으로 확인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쇠솥, 장군병이 경주 천마총 등에서 나온 쇠솥과도 거의 모양새가 닮아 있어, 고분의 생활유물들이 배에도 선적됐음을 알 수 있다”며 “황칠이 담긴 광구소호도 전형적인 경주 신라왕경의 토기로 판명됐다”고 전했다. 연구소 쪽은 이달 중에 황칠과 뱃조각 등의 유물을 공개하고, 연내로 조사 성과를 종합정리한 보고서를 펴낼 계획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