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성격 ‘날마다 한 걸음’ 출간
“한-일 미술 잇는 다리로 남을 것”
“한-일 미술 잇는 다리로 남을 것”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저는 ‘다리’로 남을 겁니다. 수집과 기증으로 한국과 일본의 미술계를 잇는 튼튼한 다리 말이지요. 제가 수집한 그림들에서 조국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재일동포 사업가이자 수집가인 하정웅(75)씨는 한국 미술계의 숨은 은인으로 꼽힌다. 거장 이우환씨를 비롯해 전화황, 곽덕준 등 재일한국인 작가들과 피카소, 샤갈 등 서양거장들 작품을 수십년간 일본에서 모아 국내 미술관에 1만점 이상 조건 없이 기부해왔다. 이런 메세나(사회공헌) 사업으로 일본과의 미술 교류에 디딤돌을 놓았다는 평가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에 징용돼 강제노동을 하다 숨진 조선인들의 원혼을 위로하는 사업을 벌여왔고, 광주에 시각장애인복지관을 건립하는 등 복지사업을 후원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고, 불멸의 작가가 꿈이었다는 그가 최근 자전 에세이 <날마다 한 걸음>(메디치)을 펴냈다. 다큐작가 권현정씨와 함께 집필한 이 책에서 하씨는 재일한국인 2세로 역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인생역정과 ‘하정웅 컬렉션’을 만든 내력, 조선인 징용희생자들의 추복과 장애인복지 사업에 나선 사연 등을 털어놓았다. 출간을 맞아 22일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난 그는 “컬렉션을 내 핏줄의 정체성을 다지는 ‘기억의 유산’으로 생각했기에 아낌없이 기증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일본 동북(도호쿠)지방 아키타에서 ‘가난한 조센진’으로 고교까지 고학했다. 도쿄에서 전기기술자로 일하며 기반을 닦은 그는 20대 중반 어느 날 한 백화점 화랑에서 재일동포 1세인 고 전화황 화백의 몽환적 작품 <미륵보살>을 보고 첫눈에 매혹돼 작품 수집에 빠져들게 된다. “전 화백 작품은 가난으로 작가의 뜻을 접은 저에게 컬렉터의 새 삶을 살게 해주었죠. 이후 한 잡지에 실린 이우환씨의 그림을 보고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의 유럽 활동 경비를 대고 작품 42점을 모아 광주시립미술관 등에 기증했습니다.”
하씨는 틈만 나면 주위에 이씨의 작품을 널리 알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 명절 때면 어머니가 집 뒤 조선인들의 무연고 무덤에 가서 절하라고 했어요. 커다란 돌 하나만 놓였던 그때 무덤의 기억 때문에 이 작가의 돌덩이 작품들이 가슴을 두드리는 ‘기도’로 느껴지곤 했지요.”
1980년대 초 광주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안마사와의 인연으로 시각장애인회관을 세우고, 아키타에서 징용당해 숨진 조선인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 건립에 나서게 된 이력도 소개한 그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사(私)를 버리는 삶을 선택한 제 인생이 훗날 ‘일보전진’이란 말로 요약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메디치 제공
재일동포 사업가 하정웅 씨. 사진 메디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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