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저녁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 모인 시민들이 안은미 컴퍼니의 이상 생일잔치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문화‘랑’] 공간과 사람
문화공간, 그곳
(28)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문화공간, 그곳
(28) 서울 통인동 ‘이상의 집’
일곱시가 되자 구석 의자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 읊조린다. 예고는 없었다. “그댈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늘밤 눈을 뜬다/ 오늘밤 눈을 감는다/ 오늘밤 꿈을 꾼다(…)”. 노래 같기도 하고 운율을 넣은 낭송 같기도 한 그의 읊조림은 파편적이고 분열적이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라는 이상 시 <오감도> 제1호 낭독과 생일 축하 노래를 끝으로 20분에 걸친 남자의 순서가 끝났다.
지난 23일 저녁 7시 서울 통인동 우리은행 골목 안쪽 100미터 지점에 있는 ‘이상의 집’. <오감도>와 <날개>의 작가 이상(1910~1937)의 생일을 맞아 잔치가 벌어졌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세살부터 스물세살까지 살았던 큰아버지 집터 일부에 세워진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지난 3월 재개관한 공간.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첫 보전재산으로 사들였고 지금은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관리와 운영을 맡고 있다.
이상 생일 잔치의 문을 연 낭독자는 어어부 프로젝트 멤버인 백현진. 그의 뒤를 시인 이수명의 강연이 이었다.
“우리는 모두 이상이라는 아이콘을 공유하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상상, 자유, 무한한 가능성이 그 아이콘의 내용이겠지요. 이상 문학은 메시지가 아니라 어떤 물체 덩어리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떠한 수식어로도 그를 가두기는 어렵죠. 그렇기 때문에 이상은 언제나 젊고 도전적인 한국문학의 첨단을 달립니다. 저처럼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이상 같은 첨단이 앞에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이상이 유언에서 언급한 레몬을 생일 선물로 챙겨왔다는 이수명은 “이상의 생일을 축하할 뿐만 아니라 자축하고 싶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 다음 순서인 안은미 컴퍼니의 축하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잔치에 모인 이들은 주먹밥과 막걸리, 과자 등을 나눠 먹었다. 동네 주민들과 행인들도 거리낌없이 잔치에 끼여들었다. 시골 할머니들의 흥겨운 춤사위를 담은 영상이 실내 벽에 투사되면서 잔치 분위기를 돋구었다.
‘상상, 자유, 무한’ 아이콘 삼아
행인, 주민, 어르신, 외국인 등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어울려
“이상의 정신 이어나가는 공간” 과도한 화장과 치장을 한 기생(아마도 금홍이) 차림의 안은미가 실내에 들어선다. 오자마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사람들에게 술을 따른다. 함께 온 젊은이들은 작은 손거울을 선물이라며 나누어준다. 거울은 이상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물건이다. 술과 거울을 돌린 안은미와 젊은이들은 무대 격인 마당으로 나간다. 안은미가 담에 앉아 내려다보는 가운데 흰색 헤드셋을 쓴 젊은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춤을 춘다. 헤드셋에 가린 그들 귀에는 들리지 않겠으되 실내에는 <세월가>에서부터 <살짜기 옵서예> <사랑밖엔 난 몰라> 같은 노래가 종작없이 흐른다. 한동안 저마다의 춤사위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이 옷을 벗는다. 겉옷을 벗는가 싶더니 이내 속옷까지 모두 벗고 알몸이 된다. 벗은 몸들 위로 몽환적인 조명이 비추고 밀가루가 쏟아진다…. 이날 잔치에 온 손님들이 200명 정도는 될 것으로 이은정 아름지기 간사는 추정했다. 10평 남짓 비좁은 공간에 그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들어설 수는 없었겠지만, 두시간에 걸친 잔치에 들며 나며 참여한 연인원이 그쯤 되리라는 것. 이상 문학의 시들지 않는 젊음을 과시하듯 상당수가 젊은 여성들이었고 어르신들과 외국인들, 심지어 취객도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이상의 집’은 이상이 실제 살았던 집은 아니지만 그나마 이상의 흔적을 간직한 유일한 공간입니다. 그러나 이상의 원고나 필기구 같은 유품 한점 없기 때문에 박물관처럼 정적이고 유폐된 공간이기보다는 이 시대의 젊은 이상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행위의 공간을 지향합니다. 어제의 생일 잔치도 그런 취지에 맞게 자유롭고 실험적으로 꾸몄어요. 평소에도 동네 주민이든 예술가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제 방식대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생일 잔치 이튿날인 24일 오후에 만난 이은정 간사는 “‘이상의 집’은 죽은 이를 박제해 놓는 곳이 아니라 이 시대 사람들이 이상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문화와 예술을 펼쳐 보이고 그걸 보는 이들이 다시 그로부터 영감을 받는 식으로 이상의 정신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의 집’은 매주 화~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점심시간 오후 1~2시 제외) 열려 있다. 탁자와 의자가 놓인 공간에 누구나 와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거나 무료로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너른 탁자 한쪽에는 이상의 작품집과 관련 책자 몇십권이 비치되어 있다. 모두가 현재 시판되는 책들이고, <날개>가 처음 발표된 <조광> 1936년 9월호와 김기림이 1949년에 펴낸 <이상선집> 두권만은 별도의 유리장 안에 있다. 커피를 마시고 공간을 이용한 이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약간의 후원금을 내기도 하는데, 얼마 전부터는 이상의 사진과 초상화, 원고, 삽화 등을 활용한 엽서를 판매하고 있다. “수익을 기대해서라기보다는 이상에 관한 구체적 실감을 바라는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것”이라고 이은정 간사는 설명했다. 이 공간의 아트 디렉팅을 돕고 있는 디자이너 안상수씨가 엽서 디자인도 맡아 주었다.
‘이상의 집’은 이상의 생일인 9월23일과 기일인 4월17일 큰 행사를 치르고, 5·6월과 10·11월에는 이상 관련 강연을 마련한다. 10월25일과 11월22일 오후 2시에는 미학자 김민수 서울대 교수와 문학평론가 신형철 조선대 교수의 강의가 예정되어 있다. 이은정 간사는 “워낙 장소가 좁은 만큼 큰 욕심을 내기는 어렵다”면서 “가능하다면 이상이 원래 살았던 큰아버지 집터 모두를 사서 좀 더 알찬 공간으로 꾸밀 수 있으면 좋겠고 나아가 이상의 자필 원고도 소장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행인, 주민, 어르신, 외국인 등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어울려
“이상의 정신 이어나가는 공간” 과도한 화장과 치장을 한 기생(아마도 금홍이) 차림의 안은미가 실내에 들어선다. 오자마자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사람들에게 술을 따른다. 함께 온 젊은이들은 작은 손거울을 선물이라며 나누어준다. 거울은 이상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물건이다. 술과 거울을 돌린 안은미와 젊은이들은 무대 격인 마당으로 나간다. 안은미가 담에 앉아 내려다보는 가운데 흰색 헤드셋을 쓴 젊은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춤을 춘다. 헤드셋에 가린 그들 귀에는 들리지 않겠으되 실내에는 <세월가>에서부터 <살짜기 옵서예> <사랑밖엔 난 몰라> 같은 노래가 종작없이 흐른다. 한동안 저마다의 춤사위에 빠져 있던 젊은이들이 옷을 벗는다. 겉옷을 벗는가 싶더니 이내 속옷까지 모두 벗고 알몸이 된다. 벗은 몸들 위로 몽환적인 조명이 비추고 밀가루가 쏟아진다…. 이날 잔치에 온 손님들이 200명 정도는 될 것으로 이은정 아름지기 간사는 추정했다. 10평 남짓 비좁은 공간에 그 많은 숫자가 한꺼번에 들어설 수는 없었겠지만, 두시간에 걸친 잔치에 들며 나며 참여한 연인원이 그쯤 되리라는 것. 이상 문학의 시들지 않는 젊음을 과시하듯 상당수가 젊은 여성들이었고 어르신들과 외국인들, 심지어 취객도 자유롭게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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