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단독] “지금의 팔미도 등대, 한국 최초 아니다”

등록 2014-10-27 15:36수정 2014-10-27 23:24

김종헌 배재대 교수 ‘원형 모형’ 공개

석조에 벽돌을 덧대어 탑 쌓아올려
현 콘크리트 등대와 외관도 ‘상이’
1910년 일제가 허물고 신축한 듯
국가문화재 승격 위한 정밀조사 제안
현재의 팔미도 등대.
현재의 팔미도 등대.
인천항 서남쪽에 있는 팔미도 등대는 한국 최초의 등대이자 모든 한국 등대들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구한말인 1903년 6월 불을 밝히기 시작한 이래 이 백색의 콘크리트 등대는 형태, 기능 등에서 이땅 곳곳 등대들의 전범이 됐다. 인천상륙작전의 전적지로도 유명해서 해양수산부가 국가문화재 승격을 추진해왔고 지난달 역사관도 생겼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 이 등대에 얽힌 뜻밖의 역사가 드러났다. 현존 콘크리트 등대는 한국 최초 등대가 아니었다. 건립 당시 원형은 벽돌과 석조 건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은제 모형이 발견됐다. 1910년 일제가 원형을 없애고 콘크리트 발라 개축했다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건축사가인 김종헌 배재대 교수는 해양학술지 <해양문화> 창간호에 최근 발표한 논고를 통해 “팔미도 현존 등대는 원래 등탑을 허물고 일제가 후대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는 근거로 1903~05년 대한제국 등대 건설을 총괄했던 영국인 총세무사 존 맥리비 브라운의 유족이 소장한 건립 당시의 등대 은제축소모형(미니어처) 사진을 공개했다.

존 맥리비 브라운 유족이 대대로 간직해온 원래 팔미도 등대의 은제 모형
존 맥리비 브라운 유족이 대대로 간직해온 원래 팔미도 등대의 은제 모형
<한겨레>가 입수한 이 등대모형 사진은 1906년 브라운이 세무사직을 떠날 때 직원들이 선물한 기념품이다. 소월미도 등대와 유사한 석조에 벽돌을 덧대어 벽체와 탑을 쌓아올린 얼개임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등대 상부의 불빛 램프(등명기)를 감싸는 등롱(금속 지붕의 구조물)의 난간 아래 받침부분이 3단이다. 현재 등대의 등롱과는 외관상 완전히 다르다. 탑 몸체도 현 등대처럼 단순원통형이 아니라 아래로 갈수록 지름이 넓어져 활처럼 휘어지며, 등탑의 비례도 차이가 있다. 김 교수는 “유족이 직접 찍어 건넨 사진”이라며 “모형 아랫부분에 ‘은둔의 왕국 한국의 해안에 설치된 첫 등대의 모형’이라는 설명도 새겨져 등대 원형을 담은 유일한 실물 자료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현재 콘크리트 팔미도 등대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1904~05년 러일전쟁이나 그밖의 어떤 사건 등에 의해 등대 원형이 크게 훼손되자, 이후 보강 대신 건물을 헐고 콘크리트 등대를 새로 만들었다는 추정이다. 불빛을 내는 등명기는 1902년 제작품이 지금도 남아있어, 등명기만 놔두고 다른 건물은 다 새로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팔미도 등대 원형과 비슷한 모양인 소월미도 등대
원래 팔미도 등대 원형과 비슷한 모양인 소월미도 등대
등대 원형이 벽돌조였다는 내용은 문헌기록에도 있다. 김 교수는 2010년 독립기념관에서 찾아낸 1905년 주한미국공사관 직원 에드윈 모건의 서신과 1910년 등대를 보강했다는 팔미도항로표지관리소의 연혁기록을 주목한다. 모건은 서신에서 당시 본국 국무부에 한국 상황을 보고하면서 인천해관 등대국 엔지니어였던 J.R 하딩(덕수궁 설조전의 설계자)이 당시 총세무사 브라운의 지시아래 작성한 팔미도 등대공사 보고내용을 실었다. 이 중에 “석탑으로 된 등탑 측면에…벽체를 쌓아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팔미도 등대 구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1907~09년 한국세관공사부등대국의 <연보>에도, 등대가 벽돌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하는 ‘연와석조(煉瓦石造)’란 내용이 잇따라 나온다.

반면 1910년 한일병합 뒤인 1927년 일본 등대국의 <일본등대표>에는 팔미도등대의 구조를 콘크리트를 뜻하는 ‘혼응토조(混凝土造)’로, 1936년 일본 수로부의 <동양등대표>에는 아예 백색원형콘크리트조라고 기술하고 있다. 공학적으로도 탑 얼개인 등대는 신축이 아닌 이상 상부의 등불 구조를 유지하면서 전체 얼개를 바꾸기는 어렵다는 게 학계 견해다. 김 교수는 “기록상으로는 팔미도 등대가 국내 최초의 서양식 유인등대로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원형이 남아있다고 할 수 없어, 국가문화재 승격을 위해서는 현 등대의 가치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현존하는 팔미도 등대가 1910년 개축된 것으로 공인될 경우 국내 최고의 등대는 1904년 4월 처음 불을 밝힌 인천항 들머리의 부도등대로 바뀌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