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 거장 고 백남준씨 (1932~2006)
새해 미술계의 시선은 지난 29일 9주기를 맞은 비디오아트 거장 고 백남준(1932~2006)에게 일제히 쏠렸다. 그동안 그가 너무 ‘저평가’ 됐다는 공감대 속에 세계 굴지의 미국 화랑 가고시안과 고인의 대리인인 미국의 장조카 켄 백 하쿠타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이 최근 전해졌기 때문이다. 가고시언의 적극적인 작가 마케팅을 통해 고인의 작품 값과 미술사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졌다. 백남준의 최고가 낙찰 기록은 2007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 당시 팔린 1995년작 ‘라이트 형제’의 낙찰가 503만홍콩달러로 한화 7억원 정도다. 홍콩 크리스티 경매 통계를 봐도 작품 낙찰가 1~10위까지 액수가 7억원부터 2억원대 사이에 머물러 있다. 앤디워홀, 제프 쿤스 같은 서구 거장들에 견주면 수십분의 일에 불과하다.
비디오아트를 창시했다는 거장이 이처럼 저평가된 이유에 대해 아직도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컬렉터나 화상, 딜러들이 적극적인 애국 마케팅을 하지 않아서 라고만 말하는 이들이 많다. 비물질성이 중시되는 비디오아트의 특성을 탓하 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배경은 따로 있다. 전세계 흩어진 그의 비디오아트 작품과 드로잉, 그림들이 정확히 몇점이고 어디에 소장되어 있는지 기초 정보를 우리는 모른다. 구입 경위나 작품 얼개가 명확하지 않은 작품들이 숱하다. 국내 소장된 상당수 백남준 작품들의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말들도 나온 지 오래다. 작품 가치를 평가할 만한 근거 자체가 빈약한 셈이다.
복잡한 전자기기로 구성된 백남준 작품들은 사후관리가 어렵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노후 부품 교체 문제다. 1980년대 이후 작품들을 도맡아 제작하며 ‘백남준의 손’으로 불렸던 전파상 출신 장인인 이정성(71) 아트마스터 대표는 누구보다도 이 문제를 고심하는 전문가다.
지난 29일 찾은 서울 을지로 대림상가 사무실에는 150여대의 구식 티브이 모니터로 가득했다. “언제 어떻게 쓰일지 모르지만, 소장처의 비디오기기가 고장날 경우 대체하기 위한 예비 부품들”이라고 했다. 이날도 미국 지인에게 부탁한 50년대 미제 필코 티브이 세트가 도착해 그는 포장을 푸는 중이었다. 전자기기는 내구연한인 10년이 지나면 교체나 수리 등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티브이 부품 등은 단종된 것들이 많고, 작품의 영상 매뉴얼과 내부 회로 배치 등을 잘 아는 전문가는 더욱 드물다. “백남준의 작품을 잘 살려 전해줘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자비를 들여 계속 대체부품을 수집하고 있다”고 이씨는 말했다.
미 가고시안화랑과 전속계약 등
새해부터 백남준에 쏠린 시선
미술사적 가치 재평가 기대감
비디오아트 특성상 저평가 분석
근본적으론 기초정보 자체가 없어
어디에 몇 점 소장됐는지도 몰라
잇따른 위작 논란도 부족한 정보탓
재단, 작품목록집 사업 추진했지만
작년 정부 지원 중단으로 ‘표류’
재단-아트센터-유족 견해 달라
백남준 작품의 교체용 모니터로 가득 찬 장인 이정성씨의 작업실 내부.
모니터 가득한 선반 아래쪽 한켠에는 국내 백남준 주요작품들의 제원과 얼개, 제작 과정, 소장 기록 들을 정리한 목록집과 자료문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재작년 백남준문화재단의 의뢰로 작품목록 사업을 하면서 수집해 정리한 자료들이다. 현재 대전시립미술관이 소장한 비디오설치물 ‘거북선’ 목록집을 펼쳐보니 고인의 여러 드로잉과 전자회로의 배치도, 애초 설치할 때 당국과 오간 공문 등이 꼼꼼히 실려 있었다. 작품목록 사업은 2013년 정부가 5억원을 지원해 첫발을 뗐지만, 지난해 지원이 끊겼다. 애써 작업한 55점의 작품목록집은 선반에서 빛볼 날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국내에 소장된 백남준 작품은 대략 500점 정도로 전문가들은 어림잡는다. 세계적으로 한국과 미국에 많고, 독일, 일본 등에도 흩어져있는데 2000~3000점 정도로 짐작한다. 생전 자유로운 생각의 미술을 추구했던 플럭서스운동의 작가였던 고인은 작품 유통, 기록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96년 쓰러진 뒤에도 작품을 다수 제작했지만, 화랑, 지인, 미술관 등과 마음 내키는 대로 거래해 작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가장 시급한 급선무가 전세계에 퍼진 진작을 망라한 작품목록을 총정리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 전작목록은 ‘카탈로그 레조네’라고 불린다. 작품 재료나 기법, 제작 시기 등은 물론 소장 경위, 전시 이력, 제작 당시 개인사까지 집대성된 총서다. 위작을 가릴 수 있는 유력한 근거 자료가 되며, 미술사적 평가의 기반이 된다. 국내에서는 화가 김환기, 장욱진 정도만 전작 목록이 구비돼 있을 뿐이다.
이씨가 공개한 백남준 비디오작품 ‘월금’의 작품목록집 일부.
백남준의 경우 목록 조사를 가로막는 현실적 한계가 만만치 않다. 백남준재단은 2013년부터 작품목록집 사업을 이정성씨와 연구자 김금미씨 등에게 의뢰해 추진해왔다. 애초 5개년 계획을 세워 2017년까지 목록집 사업을 마무리할 계획이었으나, 지난해 정부 지원 중단으로 현재 공공기관 컬렉션 중심으로 73점만 조사한 채 사업 자체가 표류해왔다. 다행히 올해 국내 작가들 작품목록집 지원 예산으로 10억원이 책정됐다. 2억~3억원 정도 쓸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상시적 지원은 아니다. 2013년 당시 사업을 꾸렸던 한 실무자는 “개인 소장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내 작품을 조사하느냐며 반발해 자료를 거의 받을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목록화 사업을 발의한 백남준재단과 컬렉션을 소장하고 연구해온 백남준아트센터는 목록화 사업에서도 서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며 다른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유족도 비슷하다. 백남준 스튜디오를 운영중인 고인의 장조카 켄 백 하쿠타는 2010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백남준 자료를 기증하고 최근에는 가고시안 갤러리와 전속계약을 하면서 아카이브 관리를 넘긴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재단과의 공조는 더욱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속계약은 백남준 작품의 범세계 아카이브 작업이 한국 미술계를 배제하고, 미국 유족과 가고시안 일변도로 진행될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태행 재단상임이사는 “켄 백 하쿠타에게 목록화 사업에 협력해달라는 공한을 서너차례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며 “유족과의 공동협력이 잘 안 풀리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목록화 사업에 관여했던 한 전문가는 “지속적인 예산 지원과 유족 및 외국 연구자들과의 네트워크망 구축에 집중해 목록화 작업의 국제적 정통성과 권위를 확보하는 게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