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임브리지대 도서관에서 발견된 고려사 필사본 완질 /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중국 청나라의 이름난 금석학자들이 소장하면서 참고했던 고려시대 역사서 <고려사>의 필사본 전질이 최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16일 이같은 조사성과를 밝히고, 확인된 <고려사> 필사본 전질 139권 19책의 정보를 공개했다. 재단 쪽은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학자인 유희해(1793~1852)가 소장했던 것으로 역시 당대 중국 금석학계의 대학자였던 옹수곤(1786~1815)이 조선의 문인들에게 부탁한 얻은 다른 소장본들과 비교해 감수한 책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19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문화교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소개했다. 336만9623자의 <고려사>내용을 단정한 해서체로 필사한 이 책은 중국 금석학자 옹방강(1733~1818)의 아들인 옹수곤과 장서가 고천리(1766~1835) 등이 함께 읽은 책이란 사실이 확인돼 학계의 눈길을 끌고 있다.
<고려사>는 김종서, 정인지 등이 1449~51년 세종 임금의 명을 받들어 139권으로 편찬한 기전체 역사서다. 대부분 목판본으로 전해지나 금속활자, 목활자본도 꽤 남아있다. 그러나 내용을 일일이 옮겨 쓴 필사본은 유명한 인물들의 이야기인 열전이나 물산, 지리 등의 기록인 ‘지(志)’ 부분만 필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전질을 필사한 기존 사례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 61책과 콜레주 드 프랑스 소장 71책 등이 있을 뿐이다. 이번에 확인된 케임브리지대학 도서관본처럼 전질을 정성스럽게 필사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재단 쪽은 “청나라 금석학자들이 조선 금석문을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지, 그리고 조선금석문 연구를 위해 <고려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구입하거나 필사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케임브리지 소장본 <고려사>는 지난해 재단이 벌인 ‘구한말 해외반출 조선시대 전적 현황 조사 연구’(책임연구자 유춘동 선문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과정에서 발굴됐다. 조사단원인 허경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이 도서관의 웨이드 문고(Wade Collection)의 서가를 살펴보다 양장 제본된 한 서책의 책등에 고려책의 다른 표기인 ‘카오리 시(KAOLI SHIH)’라고 표기된 19책을 우연히 발견해 살펴보니 이 책들이 괘선지에 해서체로 쓴 필사본 <고려사>전질이며 19세기 중국 학자들이 애장하며 돌려보았던 서책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책 첫 권의 <고려사> 서문에 해당하는 ‘진고려사전(進高麗史箋)’ 위에는 유희해의 이름과 호 ‘연정(燕庭)’이 찍힌 인장이 보이며 그의 장서 서고 명칭을 찍은 도장도 확인된다. 또 서문 ‘진고려사전’이 끝나는 부분에는 옹수곤이 “1813년 12월부터 교열하면서 읽다가 목록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글을 덧붙였으며, 권137 뒤에는 “여덟 상자나 되는 분량을 빌려다가 집에 있던 소장본과 대조하는 데 108일이나 걸렸다”는 글을 적어놓은 것도 확인된다. 특히 이 두 편의 글에는 각기 그의 이름과 자를 넣은 ‘수곤상관(樹崑嘗觀)’과 ‘성원상관(星原嘗觀)’이라는 도장을 찍어서, 자신이 대조하며 읽었음을 밝혀 눈길을 끈다.
옹수곤은 조선말기의 대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청년시절 베이징 사신단의 일원으로 가서 만났던 스승 옹방강의 세째아들로 추사와 동갑내기 친구가 되었다. 당시 옹수곤과 유희해는 고려시대 금석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어 조선 사신이 오갈 때마다 탑본을 부탁했으며, 탑본의 글자를 판독하고 고증하기 위해 <고려사>를 구해 열심히 대조해가며 읽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고려사>완질을 구하기 힘들자 김정희나 정조의 부마로, 당대의 문장가인 홍현주(1793~1865) 등에게 빠진 부분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자신의 소장본과 유희해 소장본을 대조하다가 빠진 부분을 찾아냈다고 알려져 있다. 허 교수는 “청나라의 대표적인 금석문 학자 유희해가 소장하고 옹수곤이 교감했다는 완질본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들이 당시에 조선 금석문을 연구하면서 상당한 분량의 탑본을 수집해 원문을 해독하고 제작 배경을 고증하고 있었다”며 “유희해가 조선의 금석문을 모아 엮은 <해동금석원>을 편집할 때 이 책과 한 글자씩 대조하면서 활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서적을 대학에 기증한 이는 19세기 주청나라 영국공사를 지낸 토마스 웨이드(Thomas Francis Wade, 1818~1895)라는 외교관이다. 그는 청나라에 근무할 당시 중국 고서만을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조선에서 건너온 <고려사>가 섞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세한 조사내용은 28일 연세대에서 열리는 열상고전연구회 69차 정례학술발표회에서 공개될 예정이다.
한편 재단쪽은 이번 조사에서 구한말 조선에서 영국공사로 재직했던 윌리엄 애스톤이 한글을 배우기 위해 사들였던 국문본 소설과 당시 책을 구매하면서 남긴 기록 등 구한말 도서 유통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다수 확보했다고 덧붙였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