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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파란만장한 수난사’ 정릉 재실, 옛 모습 되찾았다

등록 2015-03-23 14:21수정 2015-03-23 16:03

정릉 재실 본채 및 제기고 전경. 문화재청 제공
정릉 재실 본채 및 제기고 전경. 문화재청 제공
3년의 복원 끝에 25일 첫 공개 예정
이성계의 두번째 비 신덕왕후의 무덤
오늘날 서울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밀집지역인 중구 정동과 북한산 등산 코스로 유명한 성북구 정릉동은 모두 하나의 옛 무덤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조선 초대임금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두번째 비 신덕왕후 강씨(?~1396)가 묻힌 정릉(貞陵)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왕릉 가운데 하나이며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정릉의 재실(齋室: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 최근 옛 모습을 되찾았다.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소는 1960년대 사라졌던 정릉 재실 건물을 3년간의 공사 끝에 최근 복원해 25일 오전 10시 기념행사를 열고 공개할 예정이라고 23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2009년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 뒤 정릉의 능제복원을 위해 2012년 발굴조사를 벌여 6칸 규모의 재실터와 건물 배치 등을 확인한 바 있다. 조사결과 재실터 유적은 1788년 펴낸 조선왕조의 능묘, 예법 등에 대한 책인 <춘관통고(春官通考)>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결과와 사료를 바탕으로 2012년부터 3년간 15억여원을 들여 정릉 재실의 본채, 제기고, 행랑, 협문 3개소, 담장 등을 전문가 자문을 받아 복원했다”며 “재실 복원을 통해 조선 왕릉이자 세계유산으로서 정릉의 진정성을 회복하고 역사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신덕왕후는 고려말기 황해도 곡산의 명문세가였던 강윤성의 딸로 조선 개국 뒤 첫 왕비가 됐다. 그의 무덤인 정릉은 본래 서울 도심인 경운궁(덕수궁) 근처 정동에 있었다. 신덕왕후를 극진히 사랑했던 태조 이성계는 왕후가 1396년 승하하자 무덤이라도 가까이 두고 싶어 도성 안에 능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크고 화려하게 왕후릉을 만들었고, 그 옆에 태조 자신의 묏자리도 미리 닦아놓았다.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찰인 흥천사를 세워, 정릉에 제를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아침 수랏상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정릉 재실 위치도. 문화재청 제공
정릉 재실 위치도. 문화재청 제공
태조와 정종에 이어 1400년 조선 3대 임금에 태종 이방원(1367~1422)이 등극하면서 이 무덤은 처절한 수난을 겪게 된다. 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태종은 조선왕조 개국 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태조의 첫번째 비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의 6남2녀중 다섯번째 아들이었다. 부왕 태조가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신덕왕후는 숙명적으로 태종의 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방석을 제거하고 1400년 권좌에 오른 태종은 정릉의 망자에 대해 서릿발 같은 보복극을 벌였다. 생전 눈엣가시였던 신덕왕후를 후궁 지위로 격하시키고 역대 임금과 비를 제사지내는 종묘에서 신위를 빼버렸다. 무덤은 당시 도성밖 외진 산골짜기인 정릉동으로 이장한 뒤 봉분 흔적을 지워버렸다.

태종은 정릉의 재각과 석물도 그냥 두지 않았다. 중국 사신 숙소인 태평관을 새로 짓기 위해 정릉의 정자각을 자재로 뜯어냈고,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무덤의 병풍석을 다리 보강재로 사용했다. 정릉의 병풍석은 수년전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개천에 잠긴 채 광통교 다릿발 아래서 발견돼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정릉 재실 전경. 문화재청 제공
정릉 재실 전경. 문화재청 제공
태종의 보복 이후로 정릉은 200년 넘게 주인없는 무덤처럼 방치됐다가 1669년(현종 10)에 송시열 등의 건의로 신위를 다시 종묘에 들이면서 능을 정비하게 된다. 후궁으로 격하됐던 신덕왕후가 조선의 초대왕비로서 명예를 회복한 것은 불과 100여년전인 1899년. 당시 고종이 신덕고황후로 추존하면서 이듬해 재실을 다시 지었다. 그러나 이 재실은 초석만 남기고 1960년대 다시 멸실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50여년만에 이뤄진 재실의 재복원은 정릉의 곡절 많은 수난사를 갈무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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