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그림까지 민화라는 건 모순이에요. 민화란 낡은 명칭 쓰지맙시다. 대신 ‘길상화’라고 씁시다.”
미술사가인 윤범모 가천대 교수가 도발적으로 던진 말이 불씨였다. ‘잘써온 민화가 왜 문제냐’는 청중의 질문이 잇따랐다. 국문학사 대가인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도 한마디했다. “다양한 개념이 공존하며 바뀌는 게 학문이다. 특정한 용어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폭압이 된다”는 반론을 폈다. 회의장 분위기가 후끈해졌다. 사회를 맡은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제안했다. “저녁에 민화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다시 모입시다. 끝장토론 해보지요.”
“궁중 그림까지 민화라는 건 모순
복을 비는 ‘길상화’로 불러야”
윤범모 교수 용어 교체 제안에
채색화·전승화 등 의견 쏟아져
“21세기 민화 정의 넓혀 유지” 반론도
20일 오후 경주 현대호텔에서 열린 ‘경주민화포럼 2015’란 제목의 전통민화 심포지엄은 낮부터 저녁까지 뜨거운 입씨름이 거듭되는 진풍경을 펼쳤다.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 궁중회화와 민화’라는 주제부터 논쟁적이었다. 민화는 조선후기 민중들의 자유분방하고 해학적인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미학사상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하수의 예술’로 재발견하고, 1970년대 조자용과 김철순 등 연구자들이 궁중화 서민화를 포괄한 민화개념을 널리 알리면서 지금은 궁중화를 포함한 대중적인 미술장르로 바뀌어 많은 작가들이 계속 창작하고 있다. 이런 21세기 상황에서 현대 민화를 전통 민화 이름과 개념으로 계속 규정해야할지, 성격이 바뀐만큼 새 이름을 써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들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최근 국내 연구자들이 처음 민화를 집대성한 전집 제목을 ‘한국의 채색화’라고 달아 펴낸 것도 토론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연구자들은 물론 작가들도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좀처럼 격론하지 않는 미술사학계 관행과 달리, 그들은 낮에는 1층 홀, 저녁에는 2층 홀로 옮기며 난상토론을 이어나갔다.
20일 밤까지 이어진 ‘경주민화포럼’ 토론회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안휘준 서울대명예교수,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 윤범모 가천대 교수, 정병모 경주대 교수(왼쪽부터). 학자들 뒤로 현대민화작가가 그린 궁중모란도 병풍이 보인다.
논의에 불을 지핀 윤범모 교수는 민화 명칭은 없애야한다고 잘라 말했다. 민화보다 궁중화를 오늘날 더 많이 그리는 현실인데, 계층이 한정되는 민화는 장르개념으로 근본적 한계를 지닌다는 것이다. “행복을 비는 그림이란 뜻의 길상화가 타당해요. 궁중화, 민화들이 대부분 복을 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어서죠. 전통 민화 작가중 상당수가 절에서 그리는 화승이었고, 화원 등 실력파 화가도 많이 그렸기 때문에 야나기가 말한 저속한 무명화가 그림은 결코 아닙니다.”
윤열수 관장은 민화를 계속 쓰는 게 낫다는 반론을 폈다. 우리 전통 채색화와 궁중화를 일컫는 독창적 명칭으로 오랫동안 자리잡은만큼 섣불리 새용어를 쓰고보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다. “이번 전집 제목이 한국의 채색화인데, 채색화는 일본, 중국에 다 있어요. 고구려 벽화, 불화도 다 채색화 아닌가요? 여전히 많은 이들이 민화에서 우리 정체성을 느끼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새 말을 지어낼 이유가 없어요.”
미술사학계 권위자인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신중한 논의를 전제한 뒤, 새 용어에서는 백성들이 그렸다는 민(民)의 개념이 우선 자리잡아야 한다며 ‘서민화’, 백성을 위한 ‘위민화’, 전통을 계승한다는 뜻의 ‘전승화’ 등을 제안했다.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현대 민화 장르의 성격부터 재검토해야한다고 주문했다. “학문적으로 궁중화 민화를 나눠 연구할 수 있어요. 그러나, 지금 민화작가들의 작품들은 궁중화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이런 현실부터 이해해야지요.”
작가들은 새 용어보다 21세기 민화의 범위를 현대미술 맥락에서 폭넓게 이해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이영실 경주민화협회 회장은 “21세기 민화는 차별받지 않고 평등한 삶을 사는 이들이 자기 정서를 담아 그리는 그림”이라며 “작가의 상상력이 반영되기 때문에 기존 민화의 정의를 좀더 폭넓게 해석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토론은 30명 가까운 작가와 연구자들이 각기 발언을 쏟아내는 통에 밤 10시30분까지 이어졌다. 민화 명칭에 대한 작가들의 애착이 크다는 것과 현대 민화의 정의를 좀더 넓힐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참석자들은 “우리 민화의 현주소와 용어 문제에 대해 작가와 연구자들이 이렇게 얼굴 맞대고 제대로 토론해본 것은 처음”이라며 즐거워했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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