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문자추상과 ‘군상’연작으로 일가를 이룬 미술거장 이응노(1904~1989)는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고국에 납치돼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아들을 찾으러 동베를린으로 갔던 게 빌미가 되어 간첩단 조작 사건에 엮인 것이다.
옥에 갇힌 거장에겐 그림 그릴 도구도 소재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믿었던 고암은 전전긍긍하다 뜻밖의 작품감을 찾아낸다.
어느날 재판을 받던 중 점심 먹으라고 나눠 준 나무도시락이었다. 그는 도시락을 주머니에 숨겨 감옥으로 돌아온 뒤 하나하나 조각들을 떼어내고 베니어 합판 위에 먹다 남은 밥풀로 붙이기 시작했다. 덕지덕지 붙은 나무조각들 위로 배식용 고추장과 간장을 발라 색깔을 입혔더니 멋진 도시락 콜라주 작품이 만들어졌다. 67~69년 그의 옥중 시기 숨은 명작인 ‘구성’(사진)의 탄생이었다.
처음 공개되는 고암의 미공개 조각 천하대장군(오른쪽)과 지하여장군(왼쪽)
16일 대전 이응노미술관이 고암의 소장품전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를 개막하면서 ‘구성’을 처음 세상에 내보였다. 고암의 부인이자 이 미술관 명예관장인 박인경(90)씨가 최근 기증한 미공개 조각품 57점 가운데 하나다.
가로 24cm, 세로 20cm의 베니어 합판 위에 자잘한 나무조각들이 붙은 이 콜라주 작품은 누렇게 변색된 고추장과 간장의 색감이 곁들여져 독특한 조형미를 발산한다. 미술관 쪽은 “67~69년 옥중시기의 중요 작품으로 미술사적 가치가 크다”며 “감옥 생활의 역경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고암의 창작욕을 전해주는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에는 ‘구성’ 외에도 고암이 70년대 작업한 남녀 장승조각과 남프랑스 작업실에서 나온 문자추상 이미지가 새겨진 주방 장롱, 손가락 벌린 모양으로 군상연작을 추상화한 나무조각 등 특유의 추상정신이 깃든 미공개 조각품들이 나온다. 8월30일까지. (042)611-9802.
대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