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10주기 네트워크 모임 모습. 이영혜 백남준문화재단이사장이 생전 백남준의 이미지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노형석 기자
‘서거 10주기 전시’ 준비 모임서 ‘난장토론’
“백남준은 세계적인 작가지만, 이벤트 행사만 하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내년이 10주기인데 아직 그의 작품이 어디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목록이나 카탈로그 레조네(진작미술품 도록)조차 없어요. 국내외 권위있는 연구자들과 합심해 기본적인 것부터 만들어야죠.”
강승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이 목소리를 높이자 회의장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학고재 화랑의 우찬규 대표가 “할말은 하겠다”며 받았다. “시장에서 카탈로그 레조네는 아주 중요해요. 올해 초 유족인 켄 백 하쿠타가 미국 가고시안 갤러리와 작품 전속계약을 한 뒤로는 백남준 작품을 사는 고객이 미국 화랑쪽 진품 보증서를 요구합니다. 국내엔 목록화 작업도 안되어 있으니, 유족과 미국 쪽 화랑의 의견을 따라갈 수밖에요. 사실 유족과 미국 화랑쪽 의견이 맞는지도 의심이 들어요. 힘겨워도 정부가 예산을 대고 화랑 쪽도 힘을 보태야 합니다. ”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 모인 국내 주요 미술관, 화랑계 인사들 사이에서 그간의 백남준 전시·기념사업에 대한 불만과 비판들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비디오아트 거장 백남준(1932~2006)의 생일 이틀 뒤인 22일 밤, 서울 서소문 시립미술관 별관 회의실에서 열린 백남준 서거 10주기 전국 네트워크 전시 1차 준비모임은 밤 10시를 넘기며 난장토의를 거듭했다. 참석자들은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사장과 이남식 계원예술대총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이상 백남준문화재단 공동이사장), 김원 건축가(재단이사),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박우홍 화랑협회 회장,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장,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 태현선 삼성미술관리움 수석큐레이터 등 상당수가 미술계 실세들이었다.
한-프 공동개최 예정이던 백남준 파리 회고전,
미술계와 불화 빚어온 유족 켄 백 반대로 무산
소식 전해지자 분위기 일변…한탄·성토 이어져 원래 이날 모임은 내년 10주기를 맞아 국내 공사립미술관과 화랑들이 준비중인 추모행사·전시들의 효율적인 연계 방안을 협의하려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날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개최하려던 백남준 파리 회고전이 국내 미술계와 불화를 빚어온 유족 켄 백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고인의 장조카이자 법적 대리인인 켄 백 하쿠타와 국내 미술계 사이의 작품 저작권 시비를 비롯해 예산미비로 제자리 걸음을 해온 재단의 작품목록화 사업, 낮은 작품값 등에 대한 한탄과 성토가 잇따랐다. 2006년 타계 이래 재단, 미술관, 화랑 등이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묻혀 따로따로 전시, 연구 등을 벌이면서 작품 가치 재조명에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묻어나왔다. 국내 시장에 백남준 작품들을 처음 소개했던 갤러리현대의 도형태 대표는 “켄 백이 저작권, 진위감별 등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한국미술계에 대한 감정이 워낙 좋지않아 갈등을 풀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켄 백이 뒤늦게 미국화랑과 손잡고 고인의 마케팅에 나선 것은 긍정적 변화다. 우리도 국내 작품 소장 정보를 확실히 파악하고, 스미소니안박물관 같은 국외 주요소장처와 협력을 강화하면 논의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갤러리 아트링크의 이경은 대표는 “고장나면 수리할 곳이 막연하고, 작품 표기도 제각각으로 나오는 등 갖은 문제가 불거지는데 혼선을 바로잡을 중심이 없다”며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국내 작품들이라도 제대로 정리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3시간 넘게 진행된 토의는 국내 백남준 작품의 소재지와 소장자 목록 등 현실적인 미비점부터 풀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영혜 재단이사장은 “유족과의 갈등과 연구 역량의 한계 등 답답한 구석이 많지만, 내년 10주기에는 기관, 화랑, 소장가들이 각자의 전시 구상을 연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국내 백남준 컬렉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좋겠다”며 논의를 갈무리했다. 회의장을 나선 미술계 사람들은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처음 제대로 할 얘기들을 했다”는 반응들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미술계와 불화 빚어온 유족 켄 백 반대로 무산
소식 전해지자 분위기 일변…한탄·성토 이어져 원래 이날 모임은 내년 10주기를 맞아 국내 공사립미술관과 화랑들이 준비중인 추모행사·전시들의 효율적인 연계 방안을 협의하려는 자리였다. 그러나 전날 한국과 프랑스가 공동개최하려던 백남준 파리 회고전이 국내 미술계와 불화를 빚어온 유족 켄 백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분위기가 일변했다.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고인의 장조카이자 법적 대리인인 켄 백 하쿠타와 국내 미술계 사이의 작품 저작권 시비를 비롯해 예산미비로 제자리 걸음을 해온 재단의 작품목록화 사업, 낮은 작품값 등에 대한 한탄과 성토가 잇따랐다. 2006년 타계 이래 재단, 미술관, 화랑 등이 각자의 이해관계에만 묻혀 따로따로 전시, 연구 등을 벌이면서 작품 가치 재조명에 힘을 모으지 못했다는 자책감도 묻어나왔다. 국내 시장에 백남준 작품들을 처음 소개했던 갤러리현대의 도형태 대표는 “켄 백이 저작권, 진위감별 등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데 한국미술계에 대한 감정이 워낙 좋지않아 갈등을 풀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켄 백이 뒤늦게 미국화랑과 손잡고 고인의 마케팅에 나선 것은 긍정적 변화다. 우리도 국내 작품 소장 정보를 확실히 파악하고, 스미소니안박물관 같은 국외 주요소장처와 협력을 강화하면 논의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갤러리 아트링크의 이경은 대표는 “고장나면 수리할 곳이 막연하고, 작품 표기도 제각각으로 나오는 등 갖은 문제가 불거지는데 혼선을 바로잡을 중심이 없다”며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국내 작품들이라도 제대로 정리해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3시간 넘게 진행된 토의는 국내 백남준 작품의 소재지와 소장자 목록 등 현실적인 미비점부터 풀어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영혜 재단이사장은 “유족과의 갈등과 연구 역량의 한계 등 답답한 구석이 많지만, 내년 10주기에는 기관, 화랑, 소장가들이 각자의 전시 구상을 연계,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국내 백남준 컬렉션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면 좋겠다”며 논의를 갈무리했다. 회의장을 나선 미술계 사람들은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처음 제대로 할 얘기들을 했다”는 반응들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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