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명동성당 부근에 있던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원주 법천사터에서 옮긴 직후 찍은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원래 절터에서 찍은 사진은 전하지 않는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원주 법천사에서 반출된 뒤
명동·오사카 등 8차례 이동
조선총독부 건판사진서 확인
명동·오사카 등 8차례 이동
조선총독부 건판사진서 확인
강원도 원주 고찰을 지켜온 11세기 고려국사 지광스님의 묘탑은 왜 서울 한복판 명동으로 가야했을까. 여기 한장의 낡은 사진이 있다. 한일병합 직후인 1911년 9월 원주 법천사에서 경성 도심 메이지마치(명동 일대) 길가로 옮겨온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호)의 모습이다. 탑 뒤로 보이는 일본식 가옥과 낮은 전깃줄, 답답한 울타리와 표지판 등이 갖가지 불전장식을 새긴 승탑의 장중한 자태와 뒤엉켜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신소연·조연태 학예사가 최근 일제강점기 문화유산들을 찍은 조선총독부의 유리건판사진 소장품들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것들 중 일부다. 두 연구자는 현존하는 지광국사현묘탑의 사진 가운데 가장 오래된 104년 전 명동 이전기의 촬영사진 7점을 최근 박물관 학술지 <미술자료> 87호에 연구논문과 함께 공개했다.
이 사진들은 일본의 건축사가 세키노 다다시가 당시 조선 고적조사를 하던 중 찍었다고 한다. 동쪽 측면에서 찍은 지광국사탑 전면을 비롯해 탑 둘레에서 탑신과 기단 등 세부를 상세히 포착해 보여준다. 신소연 학예사는 “탑을 찍은 가장 이른 사진일 뿐 아니라 법천사에서 반출된 뒤 탑의 최초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며 “이후 경복궁으로 옮겨간 탑이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심하게 훼손된 뒤 시멘트로 복원됐기 때문에 사진들은 탑의 원형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박물관 쪽은 또 유리건판 복원과정에서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탑 위쪽 상륜부, 옥개석의 비천상, 불자상 등을 찍은 30년대 원형 사진도 찾아냈다고 밝혀 앞으로 세부 복원의 가능성도 열리게 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기록을 보면, 지광국사현묘탑은 1911년 와다 쓰네이치라는 일본인이 사들여 그해 9월 메이지마치의 무라카미 병원 옆으로 옮겨졌다. 조경용 석조물로 쓰기 위한 용도였다는 게 정설이다. 공개된 사진은 이전 직후 모습을 담은 것으로, 위치는 현재 명동성당 구내 가톨릭센터 부근의 저동으로 추정된다. 와다는 이듬해 남산 기슭 남창동의 저택으로 탑을 옮겼다가, 다시 일본 오사카의 귀족에게 팔아 탑을 무단 반출했다. 총독부가 이를 문제삼자 와다는 탑을 일본에서 다시 돌려받아 총독부에 기증했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경복궁으로 장식재 구실을 하기 위해 옮겨졌다.
탑은 경복궁 안에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했다. 여전히 조경장식 정도로 취급받으며, 명동이전 시절까지 합쳐 무려 8차례나 자리를 옮기거나 탑 전체를 해체, 복원하는 고난을 되풀이했다. 한국전쟁 때는 폭격으로 상부가 산산조각나는 수난을 당했고, 57년의 복원 공사와 81년 전면해체공사가 이어지면서 몸체 곳곳이 땜질투성이가 됐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 뒤뜰에 놓여있는 지광국사탑은 2004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 때도 보존상태가 나빠 이전 대상에서 빠진 바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경복궁 고궁박물관 뒤쪽에 있는 현재 탑의 모습.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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