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화랑협회의 ‘2014 서울국제아트페어’ 전시장 모습. 장기불황 속에서 경매사에 밀려 입지가 좁아진 국내 화랑업계는 최근 들어 개별 전시회보다 여러 화랑들이 모인 장터 형식의 아트페어 판매전에 매달리고 있다. 사진 노형석 기자
“지금 화랑들은 전시를 못해요. 간간이 열리는 아트페어(미술장터)와 흘러간 미술에 목을 맬 수밖에는…”
서울 강남에서 영업해온 한 고참 화랑업자의 푸념은 올가을 화랑가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008년 금융위기를 딛고 활황세에 접어든 서구시장과 달리 국내 화랑가는 수년째 거래가 정체된 상태다. 작품가격대를 가늠하는 시장 결정권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투명거래를 내세운 경매사에 빼앗겼다.
작가들의 판매전시는 메이저화랑과 소수 중견화랑을 빼고는 거의 안 보인다. 그나마 신진작가보다는 단색조회화의 퇴행적 인기를 업은 왕년의 원로추상작가들 일색이다. 특히 1990년대 큰손들의 마당이었던 서울 강남 화랑들은 사실상 개점휴업한 실정이다. 국외의 여건도 엄혹하다. 세계적 권위를 지닌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가 수년전 홍콩 미술시장에 진출한 뒤로 국내 재벌, 재력가 컬렉터들이 홍콩에서 명품들을 직거래하는 풍토가 최근 고착되면서 국내 화랑시장은 더욱 쪼그라들고 있다.
업계의 위기감 속에 9, 10월 화랑들의 작가 전시와 아트페어가 잇따라 열리거나 개막을 앞두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단색조 회화의 원로 대표작가들이나 그 언저리의 70년대 추상 전위미술 작가들을 조명하면서 단색조 인기를 과거 추상미술 전반으로 확산시키려는 흐름이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의 하종현 전(10월18일까지)과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의 이승택 전(10월18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의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1’전(29일까지) 등이 대표적이다. 하종현 작가는 새 전시에 마대자루 화폭 뒤편에서 물감을 밀어내 독특한 표면효과를 내는 구작들과 더불어 표면 물감자국을 그을린 신작들을 내놓았다.
이승택 작가는 화폭 위에 매듭지은 노끈을 붙인 ‘입체 드로잉’과 고드렛돌 설치작업 등의 구작들을 간추려 전시중이다. 가나아트 전시는 김복영 전 홍익대교수의 기획으로 이승조(1941~1990), 박석원, 이강소, 김인겸, 오수환, 김태호, 박영남 등 70년대 회화의 정신성을 좇았던 원로, 중견 추상미술가들을 재조명한다. 올해 3~4월 갤러리 현대에서 역대 추상화가 18명의 작품들을 모았던 ‘한국추상화’전에 이어지는 ‘흘러간 미술사조 회고전’ 모양새다. 모두 학계의 학술적 접근이나 담론 논의가 동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옛 추상회화 시장 확산을 위한 자리깔기 성격이 짙다. 서울옥션이 15일 열린 정기경매에서 오윤, 강요배, 임옥상씨 등 80~90년대 사회참여작가의 작품들을 들고나와 대부분 낙찰시킨 것도 화랑을 포함한 시장의 수요취향을 넓히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화랑가의 활로로 떠오른 아트페어도 내달 새 틀거지를 내세운 행사들이 시작된다. 국내 최대의 미술품 장터인 한국화랑협회 주최의 서울국제아트페어(키아프)는 10월7~11일 서울 코엑스에서 11개국 182개 화랑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다. 올해는 일본을 주빈국으로 현지화랑 20곳을 초대해 일본 현대미술품들을 부각시킬 계획이다. 협회 쪽은 아시아권 화랑들과 연대해 키아프와 비슷한 시기 대만, 중국에서 아트페어를 잇따라 열기로 하는 등 홍콩바젤에 밀린 아시아 화랑시장의 위상을 되찾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키아프는 정부예산을 받으면서도 주빈국 화랑들을 부스비를 안받고 공짜초대하거나, 참여한 일부 화랑들이 전시부스 비용을 작가들에게 대신 물려 수지를 채우는 못난 행태로 구설에 오르곤 했는데, 올해 이런 폐습을 얼마나 걷어낼지도 초점이다. 박우홍 협회회장이 “올해는 주빈국 화랑들에게 처음 부스전시비용을 받았고, 품격을 높이려고 국내 참가화랑들의 실적 평가도 제도화했다”고 공언한만큼, 성과를 지켜볼 일이다.
이밖에 올해 곳곳에 신생공간을 만들며 독자 영역을 구축해온 20~30대 젊은 작가·기획자들은 10월14~1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술장터 ‘굿-즈’를 열어 독특한 개념의 예술파생상품들을 선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