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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자화상 눈매처럼 몽환적인 영혼의 세계로 가버린 ‘천상 여인’

등록 2015-10-22 18:52수정 2015-10-22 21:10

천경자 화백 지난 8월 뉴욕서 별세
딸 이혜선씨 유골 안치 장소 안밝혀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거장인 천경자 화백. 사진 연합뉴스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거장인 천경자 화백. 사진 연합뉴스
야성적인 원색의 여인상. 사진 연합뉴스
야성적인 원색의 여인상. 사진 연합뉴스
운명의 난장인가. 야성적인 원색의 여인상으로 화단을 휘저었고, 숱한 구설을 몰고 다녔던 한 여성 거장의 삶은 이승을 떠난 순간까지도 평탄하지 못했다.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인 거장인 천경자 화백이 두달 전 미국 뉴욕에서 노환으로 별세한 사실이 22일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91.

고인은 1998년 딸 이혜선(70·섬유공예가)씨의 뉴욕 맨해튼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국내와 연락이 단절돼 사망설 등이 제기돼왔다.

고인을 돌봐온 혜선씨는 이날 오전 공개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줄곧 병석에 있다가, 지난 8월6일 새벽 5시께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하게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이씨는 “뉴욕의 한 성당에서 장례를 치른 뒤 한국과 미국 양쪽에 사망신고를 했다”며 “8월 중순 잠깐 귀국해 화장한 어머니 유골함을 들고 기증 작품을 전시중인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과 수장고를 한바퀴 돌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유골 안치 장소에 대해 “언젠가 알리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도 이날 “8월20일 이씨가 유골함을 들고 찾아온 사실을 보고받았다”고 확인했다. 김 관장은 “이씨가 모친의 사망 발표를 하지 말라고 요청해 함구해왔다. 사실이 공표됐으니 간략한 추모 절차를 준비하려 한다”고 말했다.

앞서 천 화백은 98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딸 이씨의 뉴욕 집으로 간 뒤 외부와 접촉을 끊었다. 그동안 ‘모친이 살아있다’는 이씨의 전언 외에는 생사를 파악할 단서가 없어 ‘10여년 전 숨졌다’는 식의 뜬소문들만 무성했다. 지난해엔 대한민국예술원이 회원인 천 화백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며 수당 지급을 멈추자 이씨가 회원 탈퇴서를 내는 등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고인은 60~70년대 국내 문화판의 여걸이었다. 원색조 화면에 야성미 가득한 여인과 풀꽃들이 가득 들어찬 화풍으로 대중을 매혹시켰고, 미술 에세이와 세계기행기로 베스트셀러를 낸 문필가이기도 했다.

1924년 전남 고흥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중이던 42년 ‘2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와 이듬해 ‘23회 선전’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그린 ‘조부’와 ‘노부’로 입선했다. 52년 피란지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서 선보인 ‘생태’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30여마리의 뱀이 뒤얽혀 똬리를 튼 이 작품은 20대에 두번의 결혼 실패를 겪고, 한국전쟁 때 여동생을 잃은 아픔을 삭여내며 독기로 그린 역작이었다.

60년대 이후 90년대까지 작가는 욕망·꿈·정한 따위를 표출한 환각적인 그림들을 쏟아냈다. 타히티 연작 등 퀭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매에 이국의 원시자연 속을 배회하는 자화상과 여인상들은 70~80년대 ‘천경자 그림’의 등록상표가 됐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와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 등 10권 이상의 저서도 남겼다.

시련은 말년에 다시 찾아왔다. 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한 ‘미인도’를 두고 천 화백은 ‘위작’이라고 문제를 제기했으나 미술관과 화랑가에서는 진품이라며 작가의 말을 뒤엎어버렸다. 그는 “내 자식을 내가 몰라보는 일은 없다”며 절필 선언을 했지만, 이후에도 카리브해를 돌면서 풍경 드로잉에 열중했다. 95년 호암미술관에서 마지막 회고전을 열어 8만 관객을 불러모았고, 98년 11월 애장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전격 기증한 것이 이 땅에 남긴 그의 마지막 발자취가 됐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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