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천경자 화백이 그렸는지를 놓고 진위 논란이 불거져온 ‘미인도’. 작가는 가짜라고 단정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업주들은 진짜라고 주장하면서 지금도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한겨레 자료사진
울림과 스밈
지난주 한국 미술판은 천경자, 이우환 두 거장에 얽힌 흉흉한 뉴스로 시끄러웠다. 십여년 생사가 불분명했던 천 화백이 두어달 전 숨진 사실이 딸이 한 언론사에 건넨 전화 제보로 확인됐다. 앞서 이우환 작가의 위작으로 의심되는 ‘점’, ‘선’ 연작들을 거래한 서울 인사동 화랑이 경찰 압수수색을 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1998년 뉴욕의 맏딸 이혜선씨 집으로 간 뒤 생사 여부를 놓고 논란을 부른 천 화백의 별세가 두달여 뒤 드러난 건 민망한 일이다.
98년 고인의 기증작을 받아 전시실을 운영해온 서울시립미술관은 8월 딸 혜선씨가 유골함을 들고 전시실을 돌아본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딸의 부탁으로 함구하다 보도 뒤 허겁지겁 헌화대를 차렸다.
딸 혜선씨는 모친의 죽음을 왜 두달 뒤 밝혔을까? 유골이 안치된 곳은 왜 함구할까?
이우환 위작 논란도 비슷하다. 10년 새 경매 낙찰액 총계가 700억원대를 넘었고, 지난해까지 경매에서 작품당 수억~수십억원대의 낙찰가를 유지했던 그의 작품은 올해 들어 화랑가 매매가 거의 멎어 의아심을 자아냈다.
본인은 지난해 <한겨레> 인터뷰에서 “(시중의) 내 그림들은 한 점도 가짜가 없다”고 단언했는데도, 화랑업자들은 위작 유통을 쉬쉬하면서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두 거장에 얽힌 이런 의혹들은 모두 국내 미술판의 부실한 진위 감정 체제가 화근이 됐다. 천 화백의 별세 사실을 뒤늦게 유족이 공개한 것부터가 미술판에 대한 극도의 불신감을 내비친 것이란 말이 나온다. 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전에 천 화백의 77년 작이라며 ‘미인도’를 냈다가, 작가가 한사코 자기 그림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불거진 논란이 뿌리가 됐다.
미술관 쪽은 과학감정 결과와 화랑업자, 전문가 분석을 앞세워 ‘진작’이라며 작가 주장을 묵살했다. 천 화백은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 나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고 밝힌 뒤 절필을 선언했다.
98년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한 뒤 미국으로 떠나 국내와 연락을 끊은 것도 진위 감정의 기본인 작가의 판단이 무시당한 절망감이 작용했다는 게 중론이다. 모친의 외부 노출을 막고, 그의 죽음도 상식 밖의 제보로 알린 유족의 행보도 그런 맥락으로 비친다.
게다가 정부는 불편했던 천 화백과의 과거 관계를 의식해 작고 거장들에게 추서하던 금관문화훈장을 주지 않겠다고 밝혀 유족들을 더욱 격앙시키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혜선씨를 뺀 장남과 차녀, 사위 등 유족들은 27일 오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입장 표명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밝혀 고인의 명예회복을 둘러싸고 또다른 논란도 예상된다.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우환 작가의 위작 시비는 정반대 양상이다. 지난해부터 위작 유통설이 파다했지만, 화랑들이 ‘내 작품은 모두 진작’이란 그의 발언에 눈치를 보며 진상 규명을 미루다가 경찰 수사를 불렀다. 현재 국내에는 화랑협회와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수년 전 함께 세운 한국미술품감정평가원 외에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등 3~4개 기관들이 감정을 한다. 원래 화랑협회가 단독 감정했으나, 미술품감정협회가 떨어져 나가 서로 다른 진위 판정을 내리는 등 대립하다가 수년 전 감정평가원을 만들었고, 별개의 다른 기관들도 각기 감정서를 내고 있다.
이우환 위작 파문도 일부 감정기관의 감정서를 위조해 유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이 기관들은 모두 화랑업자 중심이고 학계 전문가들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감정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이다.
2005년 이중섭 위작 파문, 2007년 박수근 ‘빨래터’ 진위 논란, 백남준 국내 작품 진위를 둘러싼 유족과 화랑계의 갈등이 잇따랐지만, 제대로 풀린 사례가 거의 없다.
작품 거래 이력을 족보처럼 투명하게 공개하고, 감정기구 통합과 공공화 같은 환골탈태 없이는 거장들이 말년 혹은 사후에 진위작 시비로 상처를 입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한겨레> 자료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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