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서울 광진구 광장동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메인홀에서 공연 연습 중인 이씨의 모습. 천장의 늘어진 외줄에 거꾸로 매달린 이씨를 아래에서 찍었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이솔빛나, 서커스의 꿈
서커스의 본질을 찾아서
도도한 여자는 어떻게 줄을 탈까
배우 이솔빛나의 날개 달기 도전
서커스의 본질을 찾아서
도도한 여자는 어떻게 줄을 탈까
배우 이솔빛나의 날개 달기 도전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새해 벽두 북한은 수소탄 실험으로 동북아에 새로운 긴장을 가져왔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은 요란하기만 하다.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외환위기 때 같은 대량 구조조정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우리 사회엔 함께 풀어야 할 여러 문제들이 산적했지만 새해에 어울릴 법한 희망 섞인 소식은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 어떻게 한 해를 맞아야 하는지는 저마다의 고민일 뿐이다. 이솔빛나(22)씨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서커스 배우를 꿈꿔왔다. 서커스라 하면 동춘서커스와 동물 묘기를 떠올리는 게 고작인 불모의 땅 한국에서 이씨는 홀로 꿈꾸고, 홀로 도전해왔다. 돌아보면 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함께 꾸는 이들의 용기 있는 발걸음이 현실을 바꾸곤 했다. 이씨는 단군 이래 최악의 시대를 산다는 이 땅 청년들 중 하나이지만,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자신이 꿈꾸고 믿는 것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최악의 양극화, ‘수저론’이 득세하는 희망 없는 시대를 사는 지친 이들에게 이씨의 도전기가 한가닥 위안이 될 수 있을까.
한국판 ‘태양의 서커스’를 미치도록 갈망했노라
▶ 한 소녀가 있다. 어린 시절 꿈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된 소녀. 소녀의 꿈은 서커스 배우다. 주변에선 늘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왜 그런 걸 하려 하느냐며. 말하기도 부끄러운 꿈을 꾸며 10여년을 보냈다. 홀로 외국에 나가 도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간절히 바랐던 서커스학교 입학은 좌절됐지만 소녀는 웃음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소녀가 꾸는 꿈은 어느새 조금씩 현실이 돼간다. 불모의 땅에서 희망을 찾는 이들이 소녀를 응원하고 함께했다. 이들의 무대가, 우리에게 감동이 될 수 있을까.
폐쇄된 취수장은 깊고 어두웠다. 건물 4층 높이인 15m가량을 아래로 파내려간 물탱크의 바닥에 무대가 드리웠다. 40년 이상 이곳에 가득했던 한강물 대신 검푸른 조명이 흘렀고, 사이사이로 붉고 노란 조명이 명멸했다. 리코더와 기타가 연주하는 음울한 단조곡과 함께 무대의 어둠만큼이나 검게 입은 이들이 말없이 무대 위를 오고 갔다. 8명의 배우들은 서로에게 달려들어 안기거나 한 발을 길게 뺀 채 물구나무를 서곤 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이 하나가 어느새 목말을 타고 머리 위로 높이 올라섰다. 객석을 응시하던 그는 잠시 뒤 더 아득한 어둠 속, 동료들 사이로 쓰러졌다. 조명이 꺼진 무대엔 정적이 흘렀다. 누군가의 기침. 이어 배우들이 돌아가며 펼치는 창작극이 이어졌다. 기예 경쟁, 외줄타기, 무용, 촌극, 장대타기. 서커스보다는 무용극, 연극이나 뮤지컬에 가까웠다. 이곳에 코끼리나 사자, 불붙은 원형 고리는 없었다. 관객을 향해 예리한 단도를 던지는 광대나, 허리를 거꾸로 꺾는 동양 소녀도 없었다. 이 서커스의 시작은, 그다지 서커스답지 않았다.
동춘서커스만 떠오르십니까?
지난달 5일 옛 구의취수장을 개조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이곳에서 지난 5개월 동안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을 이수한 배우들이 연 발표회의 이름은 ‘서커스의 본질을 찾아서’였다. 이들은 무용이나 연극, 전통연희, 파쿠르, 마셜아츠 등을 하던 이들이다. 그동안 ‘타이트 와이어’, ‘차이니스 폴’, ‘아크로바트’ 등 서커스 기예의 기초를 익혀왔다. ‘동춘서커스’가 겨우 이름뿐인 명맥을 이어가는 한국에서, 종합 엔터테인먼트 쇼로 서커스를 승화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 같은 새 흐름을 만드려는 이들이다.
각자의 창작극 무대에서도 대사 없이, 음악과 조명만 흘렀다. 배우 중 가장 어린 이솔빛나(22)씨가 두번째 무대에 등장했다. 느리고 끈적한 음악이 흘렀다. 어두운 조명 아래 천천히 립스틱을 바르고 부채를 펼쳐 든 이씨는 팽팽히 당겨진 금속제 외줄 위에 올랐다. 그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으로 천천히 여러차례 오고 갔다. 폭 1㎝가량의 줄을 건널 때마다 줄을 짚는 발의 자세, 줄을 건너는 속도, 건너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었다. 펼쳐 든 부채를 이리저리 휘두르기도 하고, 줄 한가운데에 멈춰 서 다시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한 발로 서기도 했다. 이씨가 이내 줄 위에서 뒤로 발을 뻗어 앉은 자세를 취했다. 보라색, 노란색 조명이 꺼지고 무대 뒤에서 이씨를 비춘 조명만 남았다. 이씨가 역광이 되면서 음악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씨는 “발레에 ‘돈키호테 키트리’란 작품이 있는데 이걸 줄 위에서 하면 어떨까, 도도한 여자라면 줄을 어떻게 탈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씨의 인생 첫 서커스 공연이 그렇게 끝났다.
천운영의 소설<잘 가라, 서커스>(2011)는 주인공이 중국 기예단의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몸을 기이하게 접고 구부려 탄성을 자아내는 중국 기예단의 묘기는 안쓰러울 뿐이었다. 서커스는 위험을 내포한다. 지독한 훈련을 통해 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서커스다. 그러니 서커스에서 얻는 것은 감동이 아니라 측은함이다. …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는 서커스. 그것이 진짜 서커스다.”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는 기예. 동료들이 ‘서커스 꿈나무’라 부르는 이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위험한 기예에 빠져들었다. 이씨와 지난해 8월과 12월 두차례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눴다.
“공고에 뜬 한글로 된 서커스란 단어를 보고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굉장히 설레고 기쁘고 행복하지만, 한편으론 화도 났어요. 이게 왜 대체 이제야 생겼을까.”
한달간의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의 기초과정을 끝낸 직후인 지난해 8월초 만난 이씨는 들뜨고 설레는 상태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서커스 배우를 꿈꿔왔고 그래서 줄곧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공을 들여왔는데, 서커스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 서커스를 대놓고 가르치는 곳이 갑자기 생겨난 것이다.
“9~10살 때쯤 장래에 대한 고민이 와서 힘들었어요. 그때도 예체능을 하고 있었는데 서커스만큼 설레게 하는 게 없었어요. 그때부터 서커스를 하고 싶어 찾아 헤맸는데 한국에선 접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도 부끄러웠고. 다들 동춘서커스나 동물 조련만 생각하시니….”
구의취수장을 개조한 광진구의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서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 이수한
이들이 지난달 발표회 열었다
이솔빛나(22)는 가장 어린 배우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온 서커스
국악·성악·발레·리듬체조와
쇼트트랙을 해서 금메달 따도
못 떨친 서커스에 대한 미련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를 별렀다
중3 돼서야 부모님이 인정한 꿈
이씨는 1993년 수영 선수인 아버지와 미술 전공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줄곧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씨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발레와 리듬체조를 하다 세는나이로 아홉살 때인 2001년 교통사고로 쉬던 중 우연히 접한 캐나다의 ‘태양의 서커스’ 동영상을 보고 서커스에 빠져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6~7시간 동안 인터넷을 뒤지며 외국의 서커스 동영상을 찾아봤다. 그러다 세계 최고의 서커스학교로 꼽히는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에 대해 알게 됐다. 몹시 하고 싶었고 꼭 가고 싶었다. 혼자 고심하다 털어놨지만 부모님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다. 부모님은 “그런 건 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것”이라며 이씨를 다독였다. 포기해야 했다. 사고 뒤 리듬체조를 그만둔 이씨는 쇼트트랙을 시작했다. 이씨가 다닌 서울 동대문의 사립초등학교는 다양한 예체능 실기를 가르쳤다. 덕분에 국악, 미술, 성악도 했다. 소질이 있었는지 쇼트트랙 대회에 나가 금메달도 땄다. 하지만 서커스에 대한 미련이 남았다. 빙상장 안쪽에서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또래들을 보며 서커스를 생각했다. 그 시기 ‘태양의 서커스’를 소재로 한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 <카레이도스타>가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방영됐다. 홀로 미국으로 떠난 주인공이 세계적인 서커스 무대의 스타로 성장해가는 내용이었다. 만화였지만, 주인공이 마냥 부러웠다. 이씨는 “내가 그 주인공처럼 무언가에 빠져 그렇게 열심이었던 적이 있나 싶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인 13살 때 이씨는 주변 어른들은 아무도 몰랐던 캐나다의 국립서커스학교를 반드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는 고등학교 과정부터 시작된다. 유학을 가려 해도 더 나이가 들어 가야 했다. 이씨는 일단 서커스의 기본이 되는 무용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중, 예고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뒤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로 편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반신반의했던 부모님도 이씨가 중3이 돼서야 결국 이씨의 꿈을 인정했다. 예고 시험 전 이씨는 부모님과 함께 ‘태양의 서커스’의 내한공연 <알레그리아>를 관람했다.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을 통해 프랑스 서커스 축제를 관람하기 전까지 이씨가 실제로 접한 유일한 서커스 공연이자, 이씨의 꿈을 인정한 부모님의 선물이었다. <알레그리아>의 신비롭고 몽환적인 무대에선 예술의 경지로 승화했다는 평을 받는 각종 묘기들이 펼쳐졌다. 서커스 배우가 되려는 이씨를 알아본 걸까. 공연 중 바로크풍의 의상을 차려입은 주인공 광대가 객석으로 내려와 이씨의 어깨를 만지고 눈인사를 했다. 공연 내내 무대 뒤쪽에서 노래하던 ‘화이트 싱어’도 공연 도중 객석의 이씨에게 다가와 이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노래를 불렀다. 이씨는 “선택받은 느낌이었다”고 신이 나 말했다. “그땐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이게 나의 길이다’,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또 여러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고로 진학한 해에 부모님은 사업 때문에 서울에서 충남 금산으로 내려가게 됐다. 서울에 할머니와 함께 남은 이씨는 건강이 악화됐다. 스트레스 때문에 자주 토해 먹지 못했고 이마의 피부가 괴사하기도 했다. 결국 학교를 1년 만에 그만뒀다. 몸이 회복된 뒤 방통고로 진학해 학교 수업은 인터넷으로 듣고 온종일 학원에서 무용 연습을 하는 생활을 했다. 당시 무용 선생님은 이씨의 주변 사람들 중 유일하게 ‘태양의 서커스’를 알던 사람이었다.
이씨는 선생님이 외국에서 보고 들은 서커스 이야기에 설레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아쉬운 낙방이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 2순위 합격이었다. 2012년 스무살 이씨는 재수를 고민하며 서울에 홀로 남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해 여름까지 다시 대입 시험을 봐야 할지 고민하다 결국 본격적으로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 입학을 준비하기로 했다.
2013년 2월, 몬트리올로 떠났다
그때부터 내리 3년 국립서커스학교
도전했지만 모두 쓰라린 실패
돈도 다 쓰고 상심이 너무 컸다
그리고 다시 발견한 서·커·스 서커스전문가 양성 과정 이수 뒤
‘완 브라더스’와 서커스 공연
어릴 적 꿈꿔온 일 이제 시작이다
동물묘기나 불 원형고리는 없다
본격 종합예술로서의 서커스다
‘태양의 서커스’가 뭐기에
캐나다의 국립서커스학교는 해마다 2월 입학 시험을 치른다. 전세계에서 대략 200여명의 지원자가 온다. 주로 고교 과정인 서커스 예비학교 출신이 많지만, 연령 제한이 없다 보니 이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는 이도, 다른 곳의 서커스학교를 졸업한 이도 시험을 치른다. 1차 시험은 아침 8시에 시작해 밤 11시에 끝난다. 기본적인 체력, 기술시험으로 지원자의 절반을 추린다. 시험이 끝나면 바로 결과가 나오고 다음날 다시 2차 시험이 이어진다. 유연성, 춤, 연기, 애크러배틱 기술을 시험해 다시 절반을 거른 뒤 다음날 3차 시험으로 최종 합격자를 뽑는다.
2013년 2월18일, 이씨는 홀로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 26시간 만에 국립서커스학교가 있는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시험 전날 자정, 한겨울 몬트리올은 영하 20도를 밑도는 엄동설한이었다. 이씨는 잠을 거의 못 잤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벅차올랐다. 몬트리올은 그에게 ‘꿈의 도시’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이들은 마냥 설레어 하는 이씨를 두고 “서커스 하는 한국인은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다음날 1차 시험은 체력과 유연성 테스트였다. 하체, 복부, 상체의 근력을 측정하고 무용과 기술 테스트 등을 한다. 너무 들뜬 탓이었을까. 이씨는 “별것 아닌 동작”에서 발목이 꺾여버렸다. 붕대를 감은 채 1차 시험을 겨우 치러냈다. 그날 밤 11시에 발표된 합격자 명단에 이씨의 이름은 없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첫 도전은 값진 경험이다. 내년에 다시 보면 된다. 남은 일정 동안 이씨는 몬트리올 거리를 걸으며 마음을 다독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만난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겐 ‘아깝게 마지막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처음 홀로 간 외국이었다. 자신보다 더 걱정이 많았을 이들에게 상심을 안기고 싶지 않았다. ‘부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아쉽게 떨어졌으니 내년에 다시 보면 된다, 너무 걱정 마시라’고 위로했다. 돌아와선 서커스 기예의 기초가 되는 무용과 애크러배틱을 중심으로 부족한 근력과 유연성을 늘리기 위한 훈련을 했다.
하지만 이듬해 도전한 두번째 시험에선 2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붙을 거라 기대했던 지난해 세번째 시험에서도 이씨는 2차에서 불합격했다. 이번엔 상심이 정말 컸다. 이씨는 “세번의 도전 중에 마지막 시험 때 가장 잘했다. 할 수 없었던 게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붙겠구나 싶었는데 너무 아쉬웠다”고 했다. 몬트리올에서 이씨가 해마다 머물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백진희씨는 “항상 웃으며 포기하지 않는 이씨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세번째 오디션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운동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서던 이씨를 보며 ‘이미 프로가 됐구나’ 생각했는데, 안타까웠다”고 했다.
도합 세차례의 도전이 실패한 뒤 이씨는 서울의 집을 정리하고 부모님이 계신 금산으로 내려갔다. 패밀리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도 다 써버린 터였다. 금산에서 서울을 오가며 시험 때 다친 발목의 재활치료 등을 하던 차에 우연히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 모집 공고를 접했다. 한글로 쓰인, ‘서커스’ 세 글자가 그는 시리도록 반가웠다.
이씨가 가려던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는 서커스 공연기업 ‘태양의 서커스’가 1987년에 세운, 명실공히 세계 최고 권위의 서커스학교다. 1981년 캐나다의 20대 거리예술가들이 퀘벡주의 사업공모에 당선돼 받은 10만달러로 시작된 태양의 서커스는 1980년대 당시 캐나다에서도 사양사업이었던 서커스의 동물 묘기 관행을 없앴다. 대신 음악과 춤, 의상, 분장, 무대장치 등 시각 요소를 강화하고 스토리, 음악 같은 극적 요소를 도입해 서커스를 종합공연예술이자 ‘총체극’으로 바꿔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퀴담>을 위시한 태양의 서커스의 작품들은 대개 ‘빅탑’이라 불리는 거대한 서커스 전용 텐트 안에 설치된 무대에서 진행된다. 텐트 한가운데 알루미늄으로 만든 아치에 매달린 배우들은 중력을 벗어난 듯 공중에서 늘어진 줄을 잡고 연기한다. 배우들은 동양의 경극 등을 연상케 하는 짙은 화장을 하고 기묘한 분위기의 의상을 입는다. 무대 바닥에 뚫린 미세한 구멍들 사이로 비치는 영롱한 조명은 배우를 거꾸로 비춘다.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는 음악은 공연을 한층 더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로 이끈다.
한계를 뛰어넘은 아름다움
태양의 서커스는 2014년 한 해 동안 10개의 작품이 세계 48개국에서 공연됐고, 1500만명이 관람해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해 4월엔 미국 사모펀드 티피지(TPG)캐피털과 중국 푸싱 그룹이 창업주 기 랄리베르테의 지분 80%를 15억달러에 사들였다. 최근 흥행 부진이 누적되며 재정난이 심화되긴 했지만, 태양의 서커스는 여전히 서커스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모델로 회자된다.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이 올해 초 폐쇄된 취수장 자리에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세워 서커스를 지원하기로 한 것도 한국의 낙후한 서커스를 본격적인 예술장르로 성장시키기 위함이다. 이씨를 비롯해 전문가 양성과정을 이수한 이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씨를 포함한 15명의 지원자들은 지난 6월 중순부터 한달 동안 서커스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의 기초과정을 이수했다. 이어 다시 8명으로 추려진 이들은 8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심화과정을 마친 뒤, 다시 한달 동안 프랑스에 머물며 서커스 축제를 관람하고 프랑스 국립서커스예술센터에서 연수를 받았다. 온전히 서커스로 시작해 서커스로 끝나는 날들이었다. 그 결과를 지난달 5일 발표회를 통해 소개한 것이다.
이씨는 프랑스에서 일주일 동안 내리 20편가량의 공연을 봤다. 그는 “내내 ‘너무 좋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어떤 무대는 음악이나 기예, 연기 모두 상상 이상으로 완벽해서 공연을 보다 울기도 했다. 공연에 참여한 배우들이 자기 역량을 최고치까지 끌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이씨는 연극과 무용, 서커스 등 복합 장르의 창작 공연을 하는 예술단체인 ‘완 브라더스’의 배우로 오는 21~22일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극장에서 ‘스틸 라이프’란 이름의 서커스 공연을 한다. 프랑스 리도 서커스예술학교를 졸업한 서커스 예술가 석채완씨가 연출한 작품이다. 서커스학교 입학 시험은 당분간 보지 않을 생각이다.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을 통해 만난 인연들과 함께 극단에서 본격적인 서커스 배우 일을 시작하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 꿈꿔왔던 일을 이제 조금씩 제대로 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서커스의 불모지 한국에서.
어린 시절 이씨는 서커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보며 “무언가 열심히 하는 순간은 현실 같지 않게 느껴진다. 그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보단, 그렇게 하기 위해 그전에 무엇을 했느냐가 나를 움직였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비현실적 순간이 지난 뒤 느껴지는 만족감이 이씨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서커스에 매달리게 했다. 이씨에게 서커스의 매력을 물었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거기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게다가 혼자가 아니라 무대에 참여한 배우들이 다 함께 한계를 뛰어넘는 것, 그게 서커스의 특별한 매력 같아요.”
이씨의 서커스는 한국의 ‘태양의 서커스’가 될 수 있을까.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를 가기로 결정한 어린 이씨가 보았던 애니메이션 <카레이도스타>의 등장인물들은 무대에 오르기 전 서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두 다 함께, 최고의 갈채를!”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스토리 품은 종합무대예술…이제 광장에서 피어난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폐쇄된 구의취수장을 개조해 서커스 등 거리예술을 지원하는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세웠다. 센터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서커스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원자들에게 서커스 기예를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지난달 3일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의 발표회 연습 중인 이솔빛나씨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서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 이수한
이들이 지난달 발표회 열었다
이솔빛나(22)는 가장 어린 배우다 초등학생 때부터 꿈꿔온 서커스
국악·성악·발레·리듬체조와
쇼트트랙을 해서 금메달 따도
못 떨친 서커스에 대한 미련
캐나다 국립서커스학교를 별렀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폐쇄된 구의취수장을 개조해 서커스 등 거리예술을 지원하는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세웠다. 센터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서커스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원자들에게 서커스 기예를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지난달 3일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의 발표회 연습 중인 이솔빛나씨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그때부터 내리 3년 국립서커스학교
도전했지만 모두 쓰라린 실패
돈도 다 쓰고 상심이 너무 컸다
그리고 다시 발견한 서·커·스 서커스전문가 양성 과정 이수 뒤
‘완 브라더스’와 서커스 공연
어릴 적 꿈꿔온 일 이제 시작이다
동물묘기나 불 원형고리는 없다
본격 종합예술로서의 서커스다
서울시는 지난해 4월 폐쇄된 구의취수장을 개조해 서커스 등 거리예술을 지원하는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를 세웠다. 센터는 지난해 6월부터 11월까지 서커스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원자들에게 서커스 기예를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지난달 3일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의 발표회 연습 중인 이솔빛나씨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발표회 준비를 하는 모습. 이들은 각자 무용과 연극, 마셜아츠, 파쿠르, 전통연희 등을 하는 이들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의 서커스 전문가 양성과정에 참여한 이들이 발표회 준비를 하는 모습. 이들은 각자 무용과 연극, 마셜아츠, 파쿠르, 전통연희 등을 하는 이들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