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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참전 노병들을 만날 때면 절부터 올렸어요”

등록 2016-01-28 18:50수정 2016-01-28 22:06

사진가 이병용 씨. 사진 임종업 기자
사진가 이병용 씨. 사진 임종업 기자
[짬] 한국전 참전군인 사진 프로젝트 사진가 이병용 씨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주말. 경기도 고양시 행신에 있는 사진작가 이병용(58)씨의 거주지 겸 작업실을 찾았다. 자료를 가득 꽂은 책꽂이로 작업공간과 살림공간을 구획 정리했으나 이사한 뒤끝을 겨우 수습한 흔적이 역력했다. 케이티엑스 열차 종점을 찾아든 것이나 상가-주택가 경계지대의 지하실에 둥지를 튼 것이나 임대료를 아끼려는 뜻이다. 마침 출판사에서 갓 보내온 사진집 상자를 뜯는 그의 손길이 떨렸다. 한국전 참전 21개 나라 ‘참전용사 사진 프로젝트’ 두번째인 ‘터키편’ <한국에서 온 편지>(눈빛출판사)다. 2008, 2009년 두차례 현지를 방문해 찍은 5만여장 가운데 골라낸 100여장의 사진 속 인물들에게 짙은 감정이 묻어났다. 2009년 경기도의 한 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인 지 7년 만의 출간이다. 프로젝트 첫번째 ‘에티오피아편’ <원 비르의 훈장>(2008년)이 전시만으로 끝났으니 사진집은 처음이다. 그나마 출판지원금을 받아 겨우 냈다니 감회가 남다를 만하다.

2008년부터 21개국 참전군인 찍기로
첫 작업 ‘에티오피아편’은 전시회만
최근 두번째 터키편 사진집으로 출간

“참전 이유 물으면 ‘친구 아니냐’ 반문”
‘당신은 알라신이 보내준 선물’ 감동도
“국가가 할 일 왜 사서 고생이냐구요?”

“운명인가 봐요.”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으로는 잊힌 전쟁, 남한-북한에는 이데올로기에 내몰린 동족상잔의 파국. 여전히 휴전선을 두고 대치중이지만 6월이 오면 한차례 치를 떨 뿐 들추고 싶지 않은 상처다. 21개 나라를 찾아다니며 상흔을 헤집겠다는 그의 심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지난 2008년 에티오피아 전시 때와 똑같은 질문에 그의 대답은 신통치가 않다.

“서른한살 때 사진에 입문해 마흔 넘어 시작한 이 주제가 최상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터키의 노병들은 한국전 참전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하더군요. 최상과 최선의 만남이랄까요?”

일본공예예술대학에서 연구생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재개발지역을 돌며 ‘돈 안 되는 작업’을 주로 하던 그는 2006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왔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 망명을 신청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들에게 뭔가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렌즈의 방향을 참전국으로 돌렸다.

사실 그의 작업은 막일과 흡사하다. 터키 촬영이 서너 달에 걸쳐 진행됐지만 한국보다 3.5배 넓은 터키 전역에 흩어진 재향군인협회 70여개 지부를 순회하는 게 쉽지 않았다. 선약을 하고 가지만 버스로 8~18시간 달려 지부에 도착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작업 취지를 설명하고 촬영의 승낙을 받는 절차가 끝나면 자신은 배경을 세팅하고 노병은 옷을 갈아입고 낡은 훈장을 달았다.

“제 소개를 하고 넙죽 절을 했어요. 절차라기보다는 고맙다는 제 마음이었어요. 한국에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심전심은 순간이더라구요.”

백발에다 주름살이 굵은 사진 속 인물들은 하염없이 너그러운 표정인데 눈에는 그렁그렁 물기가 배었다. 작은 쇳조각을 가슴에 달고 때로는 제복을 차려입어 노병임을 짐작할 뿐 온몸에 세월을 입은 아나톨리아 노인들이다.

“저녁 8시쯤 도착한다고 연락을 하고 한 마을을 찾아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새벽 1시에 도착했어요.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더군요. 예약해 놓은 식당의 음식이 식어 3차례나 새로 차렸대요. ‘당신이 새벽 5시에 왔더라도 기다렸을 거’라고들 했어요.” 작가는 노병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당신은 왜 한국전에 참전했냐고. 그들의 대답은 반문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친구(카르데시)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 할 거냐?”

1950년 유엔으로부터 참전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터키는 국방장관의 라디오 연설을 통해 5천명을 목표로 지원병을 받았다. 바로 이튿날 전국에서 1만5천명의 자원자가 나왔다고 한다. 한 마을에 한 명씩 추렸다. 혹여 죽거나 다쳤을 때 2명 이상은 마을이 감당하기 벅차다는 계산이었다. ‘이사를 할 때 집을 사지 말고 이웃을 사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마을공동체가 살아 있어 한 가족의 상처를 이웃이 품는 전통이 강하다. 한국전 참전 터키군은 6천여명. 특히 50년 11월27~30일 치러진 군우리 전투는 중공군 참전으로 고립된 미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진지전이었다. 중공군 제38군의 진격을 사흘간 제지하면서 미군은 가까스로 퇴각했으나 터키군은 500여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터키에서 참전군인에 대한 예우는 남다르더군요. 국가 보상은 물론 마을에서 무척 존경을 받는 게 분명했어요. 식당에 가면 여기저기서 음식과 음료가 날아오고, 누군가 먼저 밥값을 내고 나가기도 하고요. 정작 도움을 받은 한국에서 찾아와 고마움을 표한 건 제가 처음이래요. 그게 고맙다는 거죠. 참 이상하지 않아요?” 작가는 중부도시 메르신에서 만난 90살 노병이 “당신은 알라신이 보내준 귀한 선물”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더라고 했다. 한달 뒤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후유증으로 지금껏 원호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노병은 사진을 찍자니 1시간에 걸쳐 힘들여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는 10대 소녀는 작가를 만나자마자 ‘뽀뽀’를 해주기도 했다.

이씨는 터키 순회 중 변을 당하기도 했다. 참전군인으로 알고 찾아간 한 노인이 자신을 보자마자 삽자루를 들고 달려들었다. 뒤에 듣자니 군우리 전투에 참전했던 그에게, 귀국한 이래 처음 본 동양인이 중국인으로 비쳐 지옥 같았던 옛 기억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작가는 다음에 다시 찾아가 사진을 드리고 싶다고 했다. 필경 영정 사진으로 쓰일 터이지만.

프로젝트는 아직도 19개 나라가 남았다. 순조롭게 진행된다 해도 빡빡해 보인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인데 개인이 뭣하러 나서서 그 고생이냐”는 질문에 그는 대답을 못했다. 그 답을 찾을 때는 아마도 사진을 그만둘 즈음이 아니겠느냐고만 했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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