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나의 시를 말한다
당신에게서 -태백
그곳의 아이들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제 몸통보다 더 큰 울음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여름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당신에게 적은 답서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이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으로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편지를 구겨버리고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사내들은 아침부터 취해 있고 평상과 학교와 공장과 광장에도 여름빛이 내려,
이어진 길마다 검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당신에게 적은 답서에는 갱도에서 죽은 광부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질식이나 아사가 아니라 터져 나온 수맥으로 익사를 합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편지를 구겨버리고는
‘이 편지가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새로 적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지금은 우리가’ 전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자정이 지나서야 좁은 마당을
별들에게 비켜주었다 새벽의 하늘에는
다음 계절의
별들이 지나간다
별 밝은 날
너에게 건네던 말보다 별이 지는 날
나에게 빌어야 하는 말들이 더 오래 빛난다 -‘지금은 우리가’ 전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중에서
박준
우리의 모든 시간을 긍휼히 여기다 새로 쓰였는데, 이미 오래된 시가 있다. 시간의 깊은 퇴적층과 상처에 대한 긴 이해의 흔적을 지닌 시. 박준의 시는 먼 윗대부터 쌓여온 감각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발성으로, 우리가 지나쳐 온 빛바랜 삶의 감각들을 일깨운다. 골목과 정류장과 옥탑방, 별들과 굴다리 밑 전단지와 번쩍이는 군화 등 허름한 장소와 적막한 사물에 새겨져 있는. 더 정확히는, ‘나’와 ‘당신’이 수없이 어긋나며 공유해 온 감각적 실존의 오래된 삶을 되살린다. 시란 우리가 살아낸 모든 시간을 긍휼히 여기고, 따뜻하게 돌보며, 언제까지나 잊지 않는 일이라는 듯. 박준의 시는 사랑과 아름다움에 ‘매혹당한 영혼’이,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상실과 고통에 ‘관통당한 존재’로 살아가는 비극을 노래한다. 당신에게 사로잡힌 채 당신을 잃어버린 ‘나’는 불치이거나 난치인 삶에 “고음(高音)의 노래”로 맞선다. “사실 사람의 몸에서 그림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노래다”(‘모래내 그림자극’). 21세기에도 시는 여전히 노래임을 첫 시집 한 권으로 증명한 박준은 ‘석탄이 쌓인 폐’와 ‘지는 별’에서도 노래를 꺼낸다. 그 노래들의 후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미인’은 그렇게 지어 온 당신의 이름이다.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 ‘님’처럼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공용어다. 물론 어떤 이름으로도 당신을 되찾을 수 없으며, 어떤 비문(碑文)이나 비문(秘文/非文)으로도 당신을 애도할 수 없다. 당신에게 꼭 맞는 이름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잃은 사람”이, “사람의 이름으로/ 지어지지 못하는 글자들을” “오래 생각해 보는 길”(‘입 속에서 넘어지는 하루’)의 이름은 정확히 있다. 시 혹은 사미인곡(思美人曲). “내 이름을 불러주던/ 당신의 연음(延音)”과 “다음 생의 이름을/ 점쳐 보는 저녁” 사이에서 작명의 실패를 감수하며 부르는 텅 빈 이름. 비명(非名)이거나 울음인.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