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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강동원의 미모 같은

등록 2016-01-29 20:30수정 2016-01-30 12:00

이명수의 시 비스듬히
비스듬히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누구나 비스듬히 산다.

검증한 바는 없지만 단순 암기력이 상위 몇 퍼센트에 속할 만큼 뛰어났었다. 물론 내 주장이다. 덕도 많이 봤다. 초등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이란 게 선포되고 그걸 다 외워야 집에 보내주곤 했는데 난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교실을 나서는 아이였다. 전두환 시대의 그 살벌한 군대 내무반에서조차 군인의 길 따위의 암기 항목을 가장 빠른 시간에 읊어대서 열외가 된 적이 꽤 있다. 절정은 고교 시절이었다. 당시 문예반 2학년 선배들은 문학수업이랍시고 하루에 시를 5편 이상씩 외우게 했다. 못 외우면 그만큼 맞았다. 등교해서 종일 시를 외우는 게 일이었다. 2학년 선배가 되었을 때 나도 그렇게 가르쳤다. ‘응답하라 1975’ 정도의 시절에는 그런 문예반도 있었겠거니. 그 시절, 나의 암기력과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결합해 수많은 시들이 차곡차곡 몸에 쌓였다. 시 자판기처럼 누르기만 하면 수백 편의 시들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그에 대한 반동이었는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고교 시절 이후 나는 시를 외운 적이 없다. 잘 외워지지도 않는다. 그냥 보고 읽는다. 그런데 늘 예외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는 내가 외워서 낭송할 수 있는 시다. 운율이 가장 뛰어나서는 아닐 듯싶다. 그러면 김소월이나 김영랑이어야 옳다. 임신했을 때 당기는 음식처럼 어떤 시기의 나와 주파수가 꼭 맞아서였을 것이다. 내 나이 쉰 근방에서 ‘비스듬히’를 처음 읽었다.

배우 강동원. 연합뉴스
배우 강동원. 연합뉴스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란 풍선 같은 구절이, 자객이 내 얼굴에 쓰윽 칼자국을 내고 사라지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간의 성취가 내 잘남이나 똑 부러진 성격 때문인 줄 알던 삶에 심각한 균열이 시작되던 시점이었다. 일, 건강, 가족, 돈, 관계, 인정. 난 그런 것들이 다 내 공인 줄만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 시작한 순간의 부끄러움과 아득함은 지금도 설명을 잘 못하겠다. 그 후부터 내 삶의 열쇳말은 ‘음덕’이다.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도움이 없다면 나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라는 자각. 그런 자각은 외려 날 자유롭게 했다.

20대 열혈청년일 때 깜깜한 밤중에 계룡산 어느 암자를 혼자 올랐는데 다음날 날이 밝아 올라온 길을 되짚어 보다가 혼비백산했다. 밤에 오를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훗날,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다. 내가 산길을 헤매는 바로 그 무지막지한 시간에 꿈자리가 너무나 뒤숭숭해서 자다 말고 일어나 장독대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이유도 모른 채 그저 빌었다고. 난 몰랐지만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그 무작정한 기도 덕분으로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공기 같은 그런 부축의 힘들로 나는 살아지고 있을 것이다. 마니또 게임처럼 어떤 이가 내 음덕인지 알 수는 없다. 나도 누군가에겐 음덕의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나도 타인도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긍정적이거나 낙천적이지 않고 그 반대에 가까운 성격임에도, 살면 살수록 내가 공기에도 기대고 사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왜 비스듬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그런 점에서 ‘비스듬히’는 내게 군계일학 같다는 강동원의 미모 같은 시다. 절로 외워지는 시다. 위로가 되고 자유를 주는 시다. 문예반 2학년 선배의 포스로 권하노니, 한번 암송해 보시라.

이명수 ‘치유공간 이웃’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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