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리(왼쪽),가인. 연합뉴스
일부 누리꾼 막무가내식 카더라 ‘악성 루머’ 언론도 동조
‘성적 코드’ 악용한 무분별한 보도는 범죄 행위
‘성적 코드’ 악용한 무분별한 보도는 범죄 행위
지난 20일 <한경닷컴>이 ‘단독’이라는 말머리를 달고 기사를 하나 게재했다. 한예진 기자가 쓴 ‘[단독] 주지훈 휴대폰서 유출?…가인 성관계 사진 루머 유포’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떠돈다는 한 여성의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해 싣고, “연인 관계인 가수 가인(손가인)과 배우 주지훈의 성관계 사진”이라는 일부 누리꾼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가인의 소속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이 기사는 30여분 만에 삭제됐다. <한경닷컴>은 ‘바로 잡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당사자로 언급된 분들과 소속사에 깊이 사과드립니다”는 내용을 담은 사과문을 냈다. (▶바로 가기 : 가인·주지훈 루머 유포 관련 기사 바로 잡습니다 … 한경닷컴)
상상해봤다. 일부 누리꾼들의 막무가내식 카더라 ‘루머’ 대상이 가인이 아닌 남자 유명인이었어도 이런 해프닝이 있었을까. 누리꾼과 언론의 관심은 이번 사건과 달랐을 것이다. 아니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기사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남성은 여성만큼 특정한 ‘성적 코드’를 갖고 소비되지 않는다.
사실 확인 절차도 없었다. 언론이라면 누리꾼들이 유포하는 루머를 확인해서 보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누리꾼들의 말을 전하기만 한다면, 굳이 언론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이 사진이 실제로 여성 연예인의 성관계 모습을 담았다 해도, 언론은 이런 사진을 보도해선 안 된다. 연예인의 성관계 모습은 대중이 언론을 통해 알아야 할 아무런 공적 가치가 없다.
심지어 이런 보도는 범죄에 해당할 수 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1항은 카메라 등을 이용해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해 촬영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여성 연예인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보도는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걸그룹 에프엑스(f(x))의 전 멤버이자 배우인 설리(최진리)를 향한 언론의 끈적이는 집착은 한경닷컴 보도 사건보다 더한 상상의 나래에 기반을 둔다. 설리가 연인인 래퍼 최자(최재호)와 함께 있는 사진을 인스타그램 등에 올리자 언론은 이를 생중계하듯 기사를 내보냈다. 우선 설리와 설리가 올린 사진에서 파악할 수 있는 몇가지 사실을 정리해보자.
이 사실들을 언론의 기사 제목으로 번역해보면,
기사 제목만 보면, <헤럴드경제>와 <조선일보>, <서울신문>, <세계일보>는 집단 성적 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조선일보>가 내보낸 ‘설리 연인 최자… “설리, 밤에 전화해서 O 해달라고 조른다”’라는 제목의 지난 9일 기사의 내용은 설리가 래퍼인 최자에게 ‘랩’을 해달라고 조른다는 내용이었다. 논란이 불거져도 <조선일보>는 이 기사를 삭제하지 않았다. 당연히 사과같은 것도 없었다. ‘최자와 에프엑스 설리의 ‘만족샷’ 화제’라는 제목의 <세계일보> 지난해 8월 기사에는 설리와 최자가 함께 휴대전화를 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 담겨 있을 뿐이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는 이른바 ‘낚시성 기사’의 임계치를 넘어섰다. 사실과 무관하게 성적 코드를 부여한다. 연인과의 스킨십은 ‘과도한 애정행각’으로, 성별이 남자인 친구와의 포옹은 ‘파격 행보’로 해석된다. 품에 큰 셔츠를 입고 민들레를 손에 쥔 채 찍은 사진에선 봄내음보다 설리가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가 쟁점이 됐다. 휘핑크림을 입에 가득 채워 넣는 영상에선 유사 성행위를 연상시킨다는 보도가 나왔다. 언론이 스스로 상상 속의 포르노그라피를 현실화한다.
심지어 설리가 ‘선정적’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우는 적반하장식 보도도 보인다. 언론이 자의적으로 설리를 성적 대상화해놓고, 막상 성인 여성이 성적 욕망을 떳떳하게 드러내는 현상을 터부시하는 이중 잣대를 보이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연예 섹션 ‘서울en’은 지난 9일 ‘설리 알고보니 관종? ‘이제 미래를 생각해야할 때’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기사에서 “이제 설리는 ‘관종’ 행동이나 이미지 쇄신이 아닌 드라마, 영화 등 연기에 집중한다고 말했던 팬들과의 약속을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때이다”라고 평했다.
20대 성인여성이 애인과 스킨십을 하고 이를 자신의 개인적 공간인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국민 여동생’이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올해 23살인 설리는 아역배우 때부터 길게는 11년 동안 카메라 앞에 섰다. 가까이는 f(x) 활동 시절인 17살 때부터 브라운관에 나왔다. 언론과 대중에게 설리는 여전히 데뷔 시절 ‘순수한 여동생’으로 기억된다. 때문에 설리를 가볍게 성적 대상화하면서도, 막상 설리가 성적인 욕망을 암시하거나 스킨십을 하는 사진을 공개하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이중 잣대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설리는 논란이 불거지고 3주가 지나도록 ‘해명’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자신과 연인 최자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담아 공개한다. 유명인에 관한 각종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으레 뒤따르던 ‘죄송하다’ 따위의 사과나 ‘오해를 불러일으켜 유감스럽다’는 구구절절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언론에서 각종 추측성 보도를 내기만 해도 유명인들이 알아서 움츠러들던 이제까지의 관행에 역행한다. 설리를 성적 대상화하는 누리꾼이나 언론에 비판적인 또 다른 누리꾼들이 되레 설리를 응원하는 까닭이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그래픽 정희영 기자 heeyoung@hani.co.kr
23살 성인 여성이다. 애인과 여행을 한다. 밥 먹고 걸었다. 시소 탔다. 제주도다.
애인이랑 뽀뽀했다. 침대니까 이불도 있고 베개도 있다.
직업이 배우다. 애인 직업은 래퍼다.
태어나보니 여자다. 세상의 반쯤 남자다. 친구 중 남자도 있다.
봄이다. 민들레 꽃향기 맡아본다. 통 큰 셔츠 입었는데 바람 분다.
휘핑크림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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