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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 詩로부터의 도망

등록 2016-06-17 22:37수정 2016-06-17 22:38

신경림, 나의 시를 말하다
다른 시간을 위해 토요일에 시를 읽습니다. 잊어온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무뎌진 것들에 대한 송곳의 날카로움으로, 버린 것들에 대한 발견으로.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산문으로 설명하고, 시와 노랫말 전문가가 독자들에게 시의 지도를, 초대손님이 시와 관련된 체험을 들려줍니다. 지면에는 여백이 있습니다. 시인, 전문가, 초대손님들이 스쳐간 자리에 스며든 나의 다른 시간. 다른 시간을 위한 자리입니다. 시인과 초대손님의 시 낭송은 정보무늬(QR코드)를 통해 <한겨레티브이(TV)>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 주의 시인, 신경림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이것이
어머니가 서른 해 동안 서울 살면서 오간 길이다.
약방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떡집을 지나다가 잠깐 다리쉼을 하고
동향인 언덕바지 방앗간 주인과 고향 소식을 주고받다가,
마지막엔 동태만을 파는 좌판 할머니한테 들른다.
그이 아들은 어머니의 손자와 친구여서
둘은 서로 아들 자랑 손자 자랑도 하고 험담도 하고
그러다 보면 한나절이 가고,
동태 두어마리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면
어머니의 하루는 저물었다.
강남에 사는 딸과 아들한테 한번 가는 일이 없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오가면서도
만나는 삶이 너무 많고
듣고 보는 일이 이렇게 많은데
더 멀리 갈 일이 무엇이냐는 것일 텐데.

그 길보다 백배 천배는 더 먼,
어머니는 돌아가셔서, 그 고향 뒷산에 가서 묻혔다.
집에서 언덕밭까지 다니던 길이 내려다보이는 곳,
마을길을 지나 신작로를 질러 개울을 건너 언덕밭까지,
꽃도 구경하고 새소리도 듣고 물고기도 들여다보면서
고향살이 서른해 동안 어머니는 오직 이 길만을 오갔다.
등 너머 사는 동생한테서
놀러 오라고 간곡한 기별이 와도 가지 않았다.
이 길만 오가면서도 어머니는 아름다운 것,
신기한 것 지천으로 보았을 게다.

어려서부터 집에 붙어 있지 못하고
미군부대를 따라 떠돌기도 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먼 지방을 헤매기도 하면서,
어머니가 본 것 수천배 수만배를 보면서,
나는 나 혼자만 너무 많은 것을 보는 것을 죄스러워했다.
하지만 일흔이 훨씬 넘어
어머니가 다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약방도 떡집도 방앗간도 동태 좌판도 없어진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걸으면서,
마을길도 신작로도 개울도 없어진
고향집에서 언덕밭까지의 길을 내려다보면서,
메데진에서 디트로이트에서 이스탄불에서 끼예프에서
내가 볼 수 없었던 많은 것을
어쩌면 어머니가 보고 갔다는 걸 비로소 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서른해 동안 어머니가 오간 길은 이곳뿐이지만.

-<사진관집 이층> 수록-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시도 신명이 나지 않으면 못 쓴다. 시를 쓰는 일이 신바람이 나고 무언가 큰일을 하고 있다는 성취감이 없어서는, 적어도 내 경우, 제대로 된 시를 쓴 일이 없다. 실제로 나는 내가 쓰는 시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는 이렇게 시를 써도 되는 것인가 회의에 사로잡히면서 시를 쓰는 일이 시들하고 싫어진 일이 몇 번 있다.

먼저, ‘갈대’ 등 처음 시를 발표하고서다. 휴전이 되고 3년이 지나지 않았을 때니 나라가 아직 전쟁의 상처를 그냥 안고 있을 때였다. 곳곳에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고 허물어진 벽에는 총탄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거리는 거지와 상이군인과 전쟁고아로 넘쳐났고, 서울역은 먹고살기 위해 상경하는 농촌 젊은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서울역이나 종로삼가 일대가 이렇게 무작정 상경한 농촌 처녀들을 유혹해서 거대한 창녀촌을 형성하고 있던 시절이다. 한동안은 시 쓰는 일에 들떠 있던 내게 차츰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러한데 이런 세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아름다움만을 좇는 시를 쓰는 일이 과연 맞는가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하기 시작하니 시 쓰는 일이 시들하고 재미없었고, 신명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는 시를 쓸 수가 없었고, 십년을 방황하게 된다.

방황 끝에 확인한 것은 내게는 시 쓰는 일 이외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 십년의 방황이 헛되지 않아 나는 앞으로 내 시는 오늘의 내 삶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사는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에서 동떨어지지 않은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엮은 시집 <농무>가 당시의 반역사적 군사독재체제에 저항적인 정서를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한때 내 시는 시대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 되는 것으로 족하다고까지 생각했었다. 체제에 저항하는 시도 여러 편 썼고 통일이니 민족 문제를 주제로 하는 시도 주저하지 않고 썼다. 쓰고 싶어 쓴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주위의 요구와 권유에 의해서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렇게 쓰인 내 시에서는 더러 내 목소리가 아닌 남의 목소리가 들리고 내 모습이 아닌 남의 모습이 보였다. 때로는 가성도 들리고 허풍스러운 몸짓도 보였다. 시에서는 무엇이고 남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만큼 이런 시가 몹시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세상에서 좋은 소리는 내가 다 앞장서서 골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면서, 내 시가 남의 시처럼 낯설고 싫어졌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다시 시들하고 신명이 나지 않았다.

그때 찾아낸 출구가 민요다. 그 이전에도 나는 민요를 제법 좋아해서 일부러 들으러도 다니고, 몇 편의 민요조의 시도 썼던 터다. 내 시에 민요적인 정서와 표현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여 가장 우리 시다운 우리 시를 써보자는 내 의도는 여러 선후배들에게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민요모임도 만들고 민요 채집도 하면서 열심히 민요시를 썼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쓰인 내 민요시는 한 번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시를 쓰고 났을 때의 자유스럽고 홀가분한 느낌 같은 것을 맛볼 수 있게 해주지 않았다. 역시 민요는 전 시대의 노래요, 정서로서 내 시를 지나치게 “우리 것”에 가두는 낡은 옷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이 옷을 벗어버리는 데는 십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이 십년이 내게는 시 쓰는 일에 가장 신명을 내지 못한 세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터널을 지나오면서 시란 무엇에 구애받아서는 안 되고, 무엇을 위해서 혹은 누구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라는 뻔한 사실, 이데올로기에 종속하거나 목적을 가질 때 재미없는 시, 쓰는 사람한테도 읽는 사람한테도 가장 신명나지 않는 시가 된다는 다 아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것은 수확이었다. 비로소 시 쓰는 일이 정말로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
신경림 시인
생각해 보면 내가 시를 쓰는 일은 늘 내 시로부터 도망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그 도망은 완벽한 것은 되지 못했다. 내가 뿌리박고 사는 땅, 나와 함께 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부터까지 도망칠 수가 없었으니까.

신경림

*1936년생. 1955년 문화예술 ‘낮달’로 등단했다. 시집 <농무> <새재> <낙타> <가난한 사랑 노래> 등을 냈다


느릿느릿 걷는 동네 골목의 크기와 깊이

세계화와 디지털 시대의 쾌속 질주 속에서 “시는 느린 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으며, “언젠가는 버려질 방언 같은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근래 두리번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간다는 생각으로 시를 쓴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중얼거리면서.”

‘나는 왜 시를 쓰는가’(2004)라는 산문에서 신경림은 이렇게 고백한 바 있다. 1956년에 ‘갈대’로 등단해 60년간 활동해온 현역 시인이 21세기를 맞으며 실감한 것은 시의 ‘무능’이었다. 이제 시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며, 인간과 삶의 실상을 보편적인 언어로 노래할 수 없다. 적어도, 시가 이렇게 무능해졌다는 소문이 번지고 있다. 신경림은 한국전쟁 이후 반세기에 걸쳐 자신이 시를 통해 해온 일들이 별안간 부정되는 사태에 당혹한다. 신경림은 우리 시가 공동체와 그 대의적 믿음에 뿌리내리고 있던 시간과 운명을 함께해 왔기 때문이다. 신경림의 시는 폭력적인 역사와 현실에 저항하고, 서구적 근대에 맞서 민족 고유의 정체성을 되새기며,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서 인간다운 삶을 증언해 왔다. 시가 이 일들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공동체의 믿음이 이를 뒷받침했다.

신경림은 비극의 현대사 속에서 우리 시가 역설적으로 누려온 행복한 공동체의 시간이 끝나간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는 시가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어야 하며, 소수의 사람만이 알아듣는 방언일지라도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지금 신경림의 시는, 많은 것을 소유하지만 아무것도 온전히 갖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가난하지만 삶을 전유했던 지난 시대의 기억을 공급하는 데 몰두한다. 이 ‘온전한 소유’의 문제는 삶의 장소에도 적용된다.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도 단 한 곳도 제대로 가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반평생 동네 골목을 오갔을 뿐이지만 그 골목에 온전히 존재하면서 사람과 세계를 깊이 통찰한 ‘어머니’ 세대로부터 배워야 한다. 느릿느릿 걸으며 소소한 생필품을 사고 사람들을 만나는 동네 골목은, 세계 전체보다 더 크고 깊기 때문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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