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 주의 시인, 강정
봄눈사람
다리 사이 불이 꺼지고 난 뒤
눈사람이 되었다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다 물의 옷을 입은
흙의 죽음 녹아 흐르던 것에서
일어서 굳는 것으로,
절멸하던 것에서
영원의 화석으로 서서 운다
소리 없이
눈썹 아래
돌 떨구며 입에서 꽃이 핀다
내 입에서 난 것들을
나는 먹을 수 없다 향기는 봉오리보다
멀고
색채는 해의 이빨 틈새에서
십만 분의 일초대로
분열 중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박고
꽃의 그림자를 핥는다
먼 땅끝이 오금에 닿아
무릎 뒤에서 누가 말을 건다 해가 하얗다
꽃은 하양을 삼킨 모든 빛 -시집 <귀신> 수록-
눈사람이 되었다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다 물의 옷을 입은
흙의 죽음 녹아 흐르던 것에서
일어서 굳는 것으로,
절멸하던 것에서
영원의 화석으로 서서 운다
소리 없이
눈썹 아래
돌 떨구며 입에서 꽃이 핀다
내 입에서 난 것들을
나는 먹을 수 없다 향기는 봉오리보다
멀고
색채는 해의 이빨 틈새에서
십만 분의 일초대로
분열 중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박고
꽃의 그림자를 핥는다
먼 땅끝이 오금에 닿아
무릎 뒤에서 누가 말을 건다 해가 하얗다
꽃은 하양을 삼킨 모든 빛 -시집 <귀신> 수록-
강정 시인
당신이라는 불을 훔치다 강정의 시는 “인간의 정념”과 “인간의 정념 바깥으로 나가”려는 정념으로 활활 타오른다.(‘낯선 짐승의 시간’) 인간의 감정에서 생기는 강한 집착인 정념(情念)과, 모든 잡념이 사라진 정념(正念)에 대한 지향성의 공존은 강정의 시에서 ‘피로 물든 침묵’과 ‘죽음이 하는 말’ 등의 강도 높은 아이러니와 역설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강정은 정념(情念)과 정념(正念)의 두 에너지가 맞붙는 화염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고요의 신성과 야만의 짐승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공간을 살아 낸다. 그는 인간이고 귀신이고 짐승이며, 산 자이며 죽은 자이고, 실상이고 허구이며, 생전이며 사후다. 강정은 원시적인 카오스의 무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최후의 부족민이고 주술사이며 예술가다. 그가 침소밴드, ASK, 사씨난봉기 등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의 리드보컬로 활동해온 것은 이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미봉책이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불탄 방 – 너의 사진’), “나는 전 생애를 거슬러 당신이라는 불을 훔친다”(‘불탄 방 – 네가 없는 사진’). 강정의 시적 공간은 가히 우주적 기원을 지닌 정념의 화염에 휩싸여 있고, 시적 자아는 오래된 카오스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정은 “전 생애”라는 시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가 너무나 미미하면서도 더없이 거대한 맥락에 속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전 생애는 “당신이라는 불”에 의해 타올랐다. 그리고 당신의 부재는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되”도록 했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없는 시련, 즉 카오스 상태의 제3의 인격은 사랑의 주체를 위한 것이다. 나는 “나와 당신과 무관한” 제3의 인격으로서, 그러니까 사랑의 주체로서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만날 수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열렬히.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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