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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눈 없는 눈사람

등록 2016-08-12 18:59수정 2016-08-12 19:09

[토요판] 이 주의 시인, 강정

봄눈사람

다리 사이 불이 꺼지고 난 뒤
눈사람이 되었다
봄이 되어도 녹지 않는다

물의 옷을 입은
흙의 죽음

녹아 흐르던 것에서
일어서 굳는 것으로,
절멸하던 것에서
영원의 화석으로

서서 운다
소리 없이
눈썹 아래
돌 떨구며

입에서 꽃이 핀다
내 입에서 난 것들을
나는 먹을 수 없다

향기는 봉오리보다
멀고
색채는 해의 이빨 틈새에서
십만 분의 일초대로
분열 중

가랑이 사이로 고개를 박고
꽃의 그림자를 핥는다
먼 땅끝이 오금에 닿아
무릎 뒤에서 누가 말을 건다

해가 하얗다
꽃은 하양을 삼킨 모든 빛

-시집 <귀신> 수록-

지금 사는 집에 이사한 지 올해로 삼년째다. 집을 구하러 이 동네 저 동네 발품을 팔다가 코앞에 불광천변이 시원하게 틔어 있어 별 고민 없이 계약을 했었다. 2년 전, 3월 하순경이었다.

자전거길과 산책로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꽃들이 막 봉오리를 틔우려 하고 있었다. 이사를 하고 나서는 거의 매일 운동화를 신고 오래 걸어 다녔다. 여러모로 힘든 겨울을 막 벗어나려던 때였다. 몸이 많이 안 좋았었고, 겨우내 내렸던 눈들이 갈빗대 사이에 고드름처럼 박혀 몸속을 뻣뻣하게 얼리는 기분이었다. 사는 게 팍팍하다는 생각 정도를 넘어 내가 이미 죽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망상 속을 오래 헤맸다. 실제로 헛것을 많이 봤다. 영화관에서도, 작은 이차선 도로 위 육교에서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안 띄는 ‘죽은 사람의 살아 있는 모습’을 목격하곤 했었다. 무섭기보다 슬펐고, 아프기보다는 공허했다. 나 자신마저도 내 몸 바깥에 외따로 존재하는 듯 여겨졌다.

그러다가 그해 4월 중순, 큰 사건이 터졌다. 300여명의 사람들이 산 채로 수장되는 모습이 연일 생중계되었다. 흐드러졌던 천변의 벚꽃들이 막 꽃비로 산화하던 무렵이었다. 티브이(TV) 속의 죽음과 꽃들의 절멸이 산란한 몽타주로 겹쳐 잠 속에서도 뇌리에 공전했다. 이명과 환청과 가위눌림의 나날이 이어졌다. 나는 죽은 지 오래됐는데, 여전히 죽지 못한 몸의 어떤 부위가 저 스스로 전체인 양 아득바득 우기며 현세를 떠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볕 좋을 때마다 걸어 다니는 천변에선 유독 나비가 눈에 자주 띄었다. 작고 가벼운 팔랑거림이 그 어떤 커다란 짐승의 발길질보다 크고 우람하다 여겼다. 소리 없는 나비의 울음소리가 해 아래 번득인다는 생각도 했다. 거기 답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이 끈질겨 외려 어떤 말도 정연하게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모든 죽음이 내 탓이라는 공연한 자책에도 시달렸다. 술을 자주 마셨고, 다시 몸이 상하기 시작했다. 걷는 날보다 드러눕는 날들이 점점 많아졌다.

어느 날 낮이었다. 빛이 싫어 집안을 어둡게 하고 오래 누워 있는데, 실제론 없는 하얀빛 같은 게 자꾸 어른거렸다. 잠들려 눈을 감을수록 더 하얗게 동공 안쪽을 파고드는 빛. 어떤 말소리가 들리는 듯도 싶었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게도, 돌덩이처럼 무겁게도 느껴졌다. 컴퓨터를 켜고 한글 창을 열었다. 어두운 방안에 새하얀 공백이 떴다. 껌벅이는 검은 커서를 움직여 두서없이 뭔가 적어나갔다. 글을 쓴다기보다 허공에 맴도는 흰빛에 형태를 새기는 기분이었다. 몸 안의 허공을 뒤적여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얼어 있는 잔설들을 긁어내는 느낌이기도 했다. 다 쓰고 보니 조금 안정은 됐지만, 더 큰 공허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그려도 온전한 형상을 찾을 수 없어 허망한 반복에 몰두하는 화가의 심정 같은 게 돌연 이해됐다. 지우지도 다시 쓰지도 못한 채 그냥 컴퓨터를 켜두고는 다시 긴 잠에 들었다. 흰빛은 더 어른거리지 않았다.

강정 시인
강정 시인
그러곤 2년이 지났다. 이별도 해후도 있었고, 재생도 파괴도 있었고, 무심과 황홀도 있었다.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죽어 돌아오지 않은 이는 여전히 저승에서 묵묵부답이었고, 죽음을 방기한 이들 또한 이승에서 철을 삼킨 듯 묵묵부답이었다. 두 차례의 겨울을 지나며 또 여러 번 눈이 왔다가 사라졌으나 완전히 녹지도 더 얼지도 않은 눈사람 하나가 마음의 초입에서 사천왕상처럼 소리 없이 으르렁거리고만 있는 또 다른 봄의 정경. 어떤 영원한 죽음을 나도 모르게 품어버려 내가 끝끝내 죽지 않는 유령으로 누군가를 망연히 그리워하며 홀로 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망념 속에서 천변을 걸었다. 벚꽃 잎이 꽃비로 휘날리며 나비 떼를 불러내는 오후. 문득 눈사람에게 눈을 그려 넣지 않았었다는 때늦은 자각이 따갑다.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계간 <현대시세계> 등단.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산문집 <루트와 코드> <나쁜 취향> <콤마, 씨>를 냈다.


당신이라는 불을 훔치다

강정의 시는 “인간의 정념”과 “인간의 정념 바깥으로 나가”려는 정념으로 활활 타오른다.(‘낯선 짐승의 시간’) 인간의 감정에서 생기는 강한 집착인 정념(情念)과, 모든 잡념이 사라진 정념(正念)에 대한 지향성의 공존은 강정의 시에서 ‘피로 물든 침묵’과 ‘죽음이 하는 말’ 등의 강도 높은 아이러니와 역설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강정은 정념(情念)과 정념(正念)의 두 에너지가 맞붙는 화염 속에서, 인간의 욕망과 고요의 신성과 야만의 짐승이 공존하는 혼돈의 시공간을 살아 낸다. 그는 인간이고 귀신이고 짐승이며, 산 자이며 죽은 자이고, 실상이고 허구이며, 생전이며 사후다. 강정은 원시적인 카오스의 무질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최후의 부족민이고 주술사이며 예술가다. 그가 침소밴드, ASK, 사씨난봉기 등의 언더그라운드 록 밴드의 리드보컬로 활동해온 것은 이 사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 미봉책이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불탄 방 – 너의 사진’), “나는 전 생애를 거슬러 당신이라는 불을 훔친다”(‘불탄 방 – 네가 없는 사진’).

강정의 시적 공간은 가히 우주적 기원을 지닌 정념의 화염에 휩싸여 있고, 시적 자아는 오래된 카오스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정은 “전 생애”라는 시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자신의 전 생애가 너무나 미미하면서도 더없이 거대한 맥락에 속해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전 생애는 “당신이라는 불”에 의해 타올랐다. 그리고 당신의 부재는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되”도록 했다. 내가 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없는 시련, 즉 카오스 상태의 제3의 인격은 사랑의 주체를 위한 것이다. 나는 “나와 당신과 무관한” 제3의 인격으로서, 그러니까 사랑의 주체로서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이 만날 수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 더욱더 열렬히.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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