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찔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시집 <유에서 유> 수록-
“이번 시집이 유독 쓸쓸하네.”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를 다 읽고 나서 한 친구가 말했다. “아, 그래?”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저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내가 쓸쓸해졌나?”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치며 자문했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먼지가 되어 피어올랐다. 문득 지난 3년 반을 되돌아보니 아찔했다. 일상적으로는 기시감이, 사회적으로는 미시감이 꾸물꾸물 치밀어 오르던 시간이었다. 쓸쓸함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입사 초기에는 일이 서툴러 야근을 하는 날이 많았다. 오늘 출근했는데 내일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퇴근하고 시를 쓰겠다는 다짐은 지켜질 수 없었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회사에서 못다 한 일들이 떠올라 시를 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단어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국어사전을 펼쳐 내가 아는 단어가 아직 거기에 제대로 있나 확인해보곤 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자 지금 이 순간을 왠지 예전에 경험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패턴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틈나는 대로가 아니라 일부러 틈을 내서 그 패턴에 균열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일상의 미션이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 장면을 떠올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는 두고두고 가슴을 두드렸다. 메르스 사태는 새로운 차원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소식은 어처구니없는 나머지 절로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매일 아침 포털에 접속할 때마다 불안에 떨었다. 무능한 정부는 사건을 사태로, 사태를 다시 참사로 만드는 데 능했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일들을 직면할 때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를 베이지 않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힘든 말들에 악착같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동네 카페에 가서 글을 쓸 때면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속 시원하게 내쉬지 못하고 참다못해 토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청년실업부터 가계 부채까지 암담한 일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삶이 ‘사는 일’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상태를 가리킬 때가 많았다. 우리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했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릴 때면 늘 여기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걷고 있었다. 아뜩했다.
시집이 나오면 한 시기가 정리되는 느낌이 든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모든 시들을 나는 첫 직장에 다니면서 썼다. 언제부턴가 매주 일요일은 내게 시를 쓰는 날이었다. 다급한 일이 없으면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쓸 수 없었던 날들, 쓰지 못했던 날들이 더 많았지만 나는 어떻게든 한 자라도 써보려고 애를 쓰고 또 썼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는 시간이었다. 가능에 불을 지르는 시간이었다. 백지 위에는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가능성과 어떤 것도 쓸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 다 있었다. 생면부지의 연인이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제야 겨우 첫 문장을 쓸 수 있었다. 시를 쓰고 나면 어김없이 기진맥진의 상태가 찾아왔다.
시집이 나오고 회사에 사의를 밝혔다. 하나의 시기가 마무리되었다는 정체 모를 확신이 들었다. 머릿속으로만 되뇌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던 날에는 더없이 쓸쓸했다. 기시감과 미시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처음인데도 친숙했고, 처음인 것처럼 낯설었다. 눈앞에 지금까지의 당장(當場)들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아찔했다. 당장은 일이 일어난 시간과 공간을 다 품고 있는 단어다. 또 다른 당장을 마주하기 위해 좀 더 낯선 곳으로 가야 한다. 안녕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안녕과 불화해야 한다. 있음(有)에서 흐를(流) 것이고 흐름에서 말미암을(由) 것이다. 유에서 유할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다음 국면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은 시인
*1982년 전북 정읍 출생.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가, 그 밖의 책으로 <너랑 나랑 노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가 있다. 작란(作亂) 동인.가장 비루한 세계의 위엄
말놀이는 시인들이 한 번쯤은 시도하는 창작 기법이다. 혹은 어느 한 시기에 집중해서 쓰는 시적 전략이다. 오은은 좀 다르다. 오은은 말놀이를 시창작의 기술에서 시를 쓰는 근본 동력으로, 세계를 다루는 방법에서 어떤 비전을 품은 하나의 세계관으로 격상시킨다. 오은에게 말놀이는 기법이자 내용이며 세계관이자 시적 실천이다. 어쩌면 그가 시를 씀으로써 자신과 세계에 대해 하려는 모든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오은의 시에서 ‘말놀이의 세계’는 ‘세계의 현실’과 조응한다. 오은은 아예 ‘말놀이’를 대놓고 시의 제목으로 쓴다. “당신이 슬프고 맥주를 좋아한다면…// 모스크 바(bar)에 가자 (…) 제네 바의 가수는 항상 하이디, 그녀는 요들송만 부른다 바르샤 바의 술값은 너무 비싸 위스키 한 잔에 이스탄 불(dollar)을 내야 한다”.(‘말놀이 애드리브’) 예를 하나 더 들자. “편의점에 들러 유리병에 든 피클을 사요 피클이 든 유리병을 사는 건가 (피식)”.(‘디아스포라’) 말과 세계의 일치는 이렇게 엉뚱하고 비틀린 형태로 이루어진다. 아무렇게 생각하거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경로로. 오은은 말과 세계의 아름다운 조응을 예찬한 낭만주의자들이 상상하지 못한 경로로 말과 세계의 일치를 이룩한다. “뜨문뜨문 얼굴에/ 빈틈이 돋아날 운명”(‘폭력의 역사’)을 지닌 말과 세계의 일치.
오은의 시에서 말놀이는 어느새 현실이 되어 있다. 말들은 쓰잘데없는 말장난의 도구로 출발해-이 세계가 말을 대하는 경박한 태도를 반영하듯-, 말이 곧 세계인 지경/경지에 이른다. 오은의 시는 말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말이 곧 세계인 세상을 상상하고 만들기를 원한다. 오은에게 말은 가장 비루한 것이며 또 가장 위엄 있는 것이다. 그의 세 번째 시집의 제목 “유에서 유”는 ‘유’라는 음을 지닌 모든 한자어와 영어 ‘you(당신)’ 등을 폭넓게 내포한다. “유에서 유”라고 누군가 발음할 때, 이 말에 실리게 될 모든 의미와 파동은 ‘나’를 흔들고 세계를 흔든다. 그 파장 속에 ‘당신’이 있고 ‘우리’가 있다. 오은의 말놀이의 세계관은 이 불일치의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그의 비전에는 “빈틈”이 많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