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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바람에 흔들리다 시를 쏟아내는

등록 2016-09-09 19:20수정 2016-09-09 19:41

[토요판]이주의 시인, 유희경
나무로 자라는 방법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도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온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수록-

아주 어렸을 때는 아니었는데, 그 시기가 분명치 않은 기억이 하나 있다. 계절로는 여름쯤의 일이다. 커다란 호두나무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의 기다란 가지들에 매달린 잎들이 그늘을 흔들고 있었다. 아니다. 가을이었나 보다. 그때 나는 호두나무 열매를 처음 보았다. 이게 호두란다. 아버지는 초록색 과실을 발로 밟았다. 그 안에서, 호두색 호두가 나타났다. 나도 따라 과실을 밟았다. 그곳은 아버지의 고향이었고 감나무로 유명한 동네였는데 어째서 호두나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몇 개쯤 가지고 놀았나. 동네 어른들이 작은 호두나무 묘목을 가지고 왔다. 아버지는 나무를 트렁크에 싣고서는 탕, 소리 나게 닫았다. 이제 호두를 키워보는 거야. 열매가 열리려면 한참이 걸리겠지만, 네가 어른이 되면 그때쯤엔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랬나. 그렇게 다정한 분은 아니셨지만, 이튿날 서울 우리 집 아파트 단지 한 켠에 그 묘목을 심을 때 우리는 더없는 부자지간이었다. 아주 작은 나무였으므로, 그리 깊게 파지 않아도 됐다. 잘 자랄 수 있을까. 자라나 열매가 생기면 발로 밟아야 나타나는 호두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고 있던 조리개로 물을 뿌렸다. 늦었지만 이건 네 나무야.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동생이 얄밉게 종알거렸다. 내 것은? 안 돼. 이건 내 나무야. 내 나무. 처음으로 입에 물어본 말이었다. 순간 애정이 싹을 틔우더니 순식간에 우렁우렁 자라나, 시골집 그 큰 호두나무처럼 그늘을 흔들었다.

매일매일 나무에게로 갔다. 내 나무를 보고 싶었다. 개나리의 낭창낭창한 가지들 곁에서, 장차 장대해질 나무가, 호두를 툭툭 떨어뜨릴 내 나무가 하루씩 나이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관심이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내 나무라고 해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아니고, 강아지처럼 졸졸 쫓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나무를 잊었다. 이듬해 식목일이 되어서야 나무가 잘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런 까닭일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망연히 잘려 남은 아주 작은 그루터기를 내려다보았다. 착각했구나. 이게 호두나무인 줄을 몰랐던 거야. 발목이 시큰했다. 내가 경비 아저씨들을 힘껏 미워하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패목을 곁에 심었다. 자르지 마시오. 호두나무입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내 나무는 패목과 함께 미처 자라기도 전에 잘리고 또 잘렸다. 매년 아버지와 나는 두툼해져가는 나무 그루터기만을 확인했다. 그때마다 무릎이, 손목이, 관절 마디마디가 시큰해지고, 키가 자랐다. 그동안, 나는 내 나무를 잊으며 나이를 먹어갔고, 제법 두툼해진 그루터기를 남겨놓고서 동네를 떠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며칠 뒤에 나는 다시 그 나무를 떠올렸다. 꿈을 꿨기 때문이었다. 호두나무 아래서 호두를 밟는 꿈이었다. 아버지는 없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느꼈다. 젖은 꿈에서 깨어나 침대에 앉아서 그렇게 생각했다. 내 나무를 떠올렸다. 아직 거기서, 잘리고 잘려가며 있을까. 그럴 리 없다. 그 아파트는 없어진 지 오래니까. 조금 막막해졌고, 슬퍼졌다. 그때 소리를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과 잎이 닿는 소리. 침대에 누워서 나무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았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나는 나무를 하나 품고 산다. 그 나무는 은유도 아니고 실제도 아니다. 그 나무는 때론 크고, 가끔 몹시 작다. 심긴 것인지 심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나무의 시간은 같다. 나의 가을에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다가 근사한 나뭇잎을 쏟는다. 나의 겨울에 나무는 눈 덮인 가지를 갖는다. 그 나무는 호두나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열매를 맺기는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품종이라고 해도, 달지 못하고 내내 자라며 잘리고 잘리다가 널찍한 그루터기로 남을 수도 있다. 어쩌면 운이 좋아 한두 개쯤 매달아볼 수도 있겠지.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내 나무다. 잊기도, 찾기도 하는.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떤 시간이 아득하게 지나가도 거기에 있는. 비밀스런 내 나무. 지금은 시이며, 때로 다른 것이 되기도 하는.

유희경 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과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했으며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이 있다. ‘2011년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했다.


나무 둥치가 품은 시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서 있는 것”,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인용 순서대로,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k’, ‘내일, 내일’, ‘당신의 자리’)

유희경의 시집에서 몇 구절을 골라 나열하니, 홀로 된 문장들이 모여 다시 한 편의 시가 된다. 이 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나열할 때마다 달라지는, 모든 문장에 열려 있으나 어떤 문장도 갖고 있지 않은 이 시를.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로부터 와서 또 다른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내는 이 미묘한 말들의 모음을.

이것은 유희경의 시가 창작되는 방식이며,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시를 갖게 되는 내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한 말들을 “잠시 어떤 시간”에 모은 것, 그것이 ‘나’에게는 ‘시’다. 아프게, 기쁘게, 허망하게 와 닿은 당신의 말들을 듬성듬성 떠올리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가 탄생한다. 내용이 계속 바뀌고 덧입혀지는 이 시를 나는 완성할 수 없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중단할 수도 없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의 이해와 반응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당신에 대해 무지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감수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심지 않”은 “나무의 둥치”, 열매를 “달지 못하고 내내 자라며 잘리고 잘리다가 널찍한 그루터기로 남을” 가능성이 큰 “나무의 둥치”다.

유희경의 말처럼 “은유도 실제도 아닌” 이 나무는, 그러나 은유이며 실제이기도 한 까닭에 완전히 베어낼 수 없다. 베어내도 어느새 다시 자라난다. 실제의 나무도 능히 그럴진대, 은유의 나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은유와 실제를 아우르면서도 열매와 이파리를 감히 소망하지 않는 유희경의 “나무 둥치”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 냉정하게 표현하면 “나와 다른 한 명”(‘궤적’)의 이야기가 기록되는 시의 공간이다. 뿌리와 밑동만 남아, 무성했던 잎과 맺지 못한 열매를 기억과 상상의 시제로 거느린 나무 둥치는, 이 세계의 시와 사랑이 지속되는 비극적인 방식을 표상한다. 유희경 시에 깊이 배어 있는 슬픔의 연원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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