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이주의 시인, 유희경
나무로 자라는 방법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도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온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수록-
두 눈이 빨개지고
두 손이 비어 아플 정도로
아무도 아니었다 나무가 애석한 까닭에 대해서
남자도 새도 가지도 방금,
지워질 듯 떨어져버린 잎도
할 말이 없다 대개 그렇듯 잠시 어떤 시간이 지나간다 남자는 나무를 심지 않았고
나무의 둥치를 만져본 적 없고
몸을 기댄 적도 없지만,
남자와 나무의 속도는 같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당신이 아닐 수 없기도 하다
당신이 남자와 나무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러하다 방금 떨어진 것은 나무의 잎맥이고
나무의 전생이며 지독하게
갔다가 돌아온 남자의 일상이고
무표정한 당신의 민낯 한 남자가 있고 한 그루
나무와 당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아무도 아무것도 아닐 만큼
어떤 시간이 지나가고 나도
모르고 있을 그만큼의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수록-
나무 둥치가 품은 시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응의 바깥에 서 있는 것”,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 “당신은 그토록 나를 지우는 사람이다”.(인용 순서대로, 시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k’, ‘내일, 내일’, ‘당신의 자리’) 유희경의 시집에서 몇 구절을 골라 나열하니, 홀로 된 문장들이 모여 다시 한 편의 시가 된다. 이 시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나열할 때마다 달라지는, 모든 문장에 열려 있으나 어떤 문장도 갖고 있지 않은 이 시를.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로부터 와서 또 다른 시(간과 장소)를 만들어내는 이 미묘한 말들의 모음을. 이것은 유희경의 시가 창작되는 방식이며,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시를 갖게 되는 내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한 말들을 “잠시 어떤 시간”에 모은 것, 그것이 ‘나’에게는 ‘시’다. 아프게, 기쁘게, 허망하게 와 닿은 당신의 말들을 듬성듬성 떠올리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가 탄생한다. 내용이 계속 바뀌고 덧입혀지는 이 시를 나는 완성할 수 없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중단할 수도 없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의 이해와 반응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은 당신에 대해 무지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감수하는 일이다. 당신은 내가 “심지 않”은 “나무의 둥치”, 열매를 “달지 못하고 내내 자라며 잘리고 잘리다가 널찍한 그루터기로 남을” 가능성이 큰 “나무의 둥치”다. 유희경의 말처럼 “은유도 실제도 아닌” 이 나무는, 그러나 은유이며 실제이기도 한 까닭에 완전히 베어낼 수 없다. 베어내도 어느새 다시 자라난다. 실제의 나무도 능히 그럴진대, 은유의 나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은유와 실제를 아우르면서도 열매와 이파리를 감히 소망하지 않는 유희경의 “나무 둥치”는 “나와 당신의 이야기”, 냉정하게 표현하면 “나와 다른 한 명”(‘궤적’)의 이야기가 기록되는 시의 공간이다. 뿌리와 밑동만 남아, 무성했던 잎과 맺지 못한 열매를 기억과 상상의 시제로 거느린 나무 둥치는, 이 세계의 시와 사랑이 지속되는 비극적인 방식을 표상한다. 유희경 시에 깊이 배어 있는 슬픔의 연원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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