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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집행 잘못해 두렵다” 1500년전 신라 지방관이 올린 반성문이 나왔다

등록 2017-01-04 10:44수정 2017-01-04 22:03

함안 성산산성에서 나온 6세기 사면목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행정문서로 판명돼
법 집행 잘못한 어리석음 아뢴다는 내용
신라 율령제 법률이 지방까지 시행된 사실 입증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뒤 보존처리과정에서 확인된 보고서용 사면목간의 1, 2, 3, 4면에 새겨진 글자들. 1면에는 3월에 진내멸촌주(眞乃滅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뢴다는 도입부 문구가 새겨져있고, 2면은 ‘이타리(伊他罹) 급벌척(及伐尺)이 □법에 따라 30대라고 고하여 지금 30일을 먹고 가버렸다고 아뢴다’는 실책 내용이 나온다. 이어 3면에서는 ‘앞선 때에는 60일을 대법(代法)으로 하였었는데,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뢴다’며 자책하면서 4면에서 ‘□성(□城)에 계신 미즉이지(?卽?智)대사(大舍)와 하지(下智) 앞에 나아가 아뢴다’며 끝맺고 있다.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뒤 보존처리과정에서 확인된 보고서용 사면목간의 1, 2, 3, 4면에 새겨진 글자들. 1면에는 3월에 진내멸촌주(眞乃滅村主)가 두려워하며 삼가 아뢴다는 도입부 문구가 새겨져있고, 2면은 ‘이타리(伊他罹) 급벌척(及伐尺)이 □법에 따라 30대라고 고하여 지금 30일을 먹고 가버렸다고 아뢴다’는 실책 내용이 나온다. 이어 3면에서는 ‘앞선 때에는 60일을 대법(代法)으로 하였었는데, 제가 어리석었음을 아뢴다’며 자책하면서 4면에서 ‘□성(□城)에 계신 미즉이지(?卽?智)대사(大舍)와 하지(下智) 앞에 나아가 아뢴다’며 끝맺고 있다.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산산성 안에서 사면목간이 출토될 당시의 모습.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산산성 안에서 사면목간이 출토될 당시의 모습.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1500여년전 신라시대 지방관리가 경주에서 파견된 중앙관리에게 법을 잘못 집행했다고 실토하며 올린 반성문 성격의 문서 목간(나무쪽 문서)이 발견됐다. 한반도에서 출토된 옛 행정문서로는 가장 시기가 앞선데다, 당대 법률(율령)에 기반한 신라 지방행정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처음 나온 것이어서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4~16년 경남 함안에 있는 신라시대의 성산산성터를 조사하다 나온 목간 23점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6세기께 신라 지방관의 보고 내용이 4면에 새겨진 목간(나무쪽 문서)을 확인했다고 3일 발표했다. 연구소가 낸 자료를 보면, 이 목간은 길이 34.4㎝, 두께 1.0~1.8㎝로, 소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4면에 글자 56자를 새겼는데, 3월에 당시 ‘진내멸(眞乃滅)’이란 곳의 촌주가 중앙에서 파견된 것으로 보이는 상관에게 올린 보고서 형식을 띠고 있다. ‘급벌척(及伐尺)’ 직위를 지닌 ‘이타리’(伊他罹)라는 사람이 법에 따라 고하여 30일만 일하고 갔는데 앞서 시행된 법을 보니 60일로 정해진 것을 알게 돼 (실책을)두려워하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아뢴다는 내용이다. 시기를 앞부분에 명기하고 ‘~에게 아뢰다’는 뜻의 ‘白(백)’자로 문장이 끝나는 특유의 문서 형식을 갖고있다.

이번에 확인된 이 행정문서 목간은 6세기초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년)때 중국의 영향을 받아 처음 반포한 법률 제도인 율령(律令)이 이후 지방까지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실체로 보여주는 유물이다. 특히 목간 내용 중에 나오는 ‘□법삼십대(□法三十代)’, ‘육십일대(六十日代)’ 등의 표현은 30일, 60일이라는 기간을 명시한 옛 법률 용어로, 당시 신라가 율령을 통한 지방 통치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6세기 중반께 신라 지방사회에 문서행정이 구체적으로 시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당대 신라 율령이 실제 적용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는 게 학계의 평가다. 이 목간을 사전에 연구 검토한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신라 율령제는 사서 외에는 실체가 전해지지 않아 논란이 있었는데, 이를 입증하는 자료들이 실물로 확인됐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지닌다”며 “지방관리들이 행정의 세세한 부분까지 적법한지 맞춰보고 두려워했다는 것은 당시 신라가 강고한 법치국가였음을 보여주는 단서”라고 말했다.

경남 함안 성산산성터 전경. 가야 신라시대 지방 통치 거점으로 90년대 이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17차까지 계속 이어져왔다. 국내 최대의 고대 목간(나무쪽 문서) 출토지로 유명하다.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경남 함안 성산산성터 전경. 가야 신라시대 지방 통치 거점으로 90년대 이래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가 17차까지 계속 이어져왔다. 국내 최대의 고대 목간(나무쪽 문서) 출토지로 유명하다. 사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목간의 내용 중에서 신라 경주에 거주하는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관직 체계인 경위(京位)의 관등 이름이 처음 확인된 것도 주목된다. 그동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는 신라 지방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관등체계인 외위(外位) 관등명만 나타난 바 있는데, 이번에 확인된 사면 목간에서는 경위(京位) 중 12등급인 ‘대사(大舍)’ 관등명이 발견돼 성산산성이 중앙정부의 직접 통제 아래에 있었음을 알게 됐다. 또 <삼국사기> 등의 사서에 나오지 않는, ‘급벌척(及伐尺)’이라는 외위 관등명이 새로 판독된 것도 눈길을 끈다.

국내에서 목간을 행정문서로 쓴 사례는 7세기 백제 능산리 출토 목간과 경주 월성 해자 출토 관청 목관 등이 보고된 바 있으나, 훨씬 후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일본 고대 도읍지인 나라현의 헤이조쿄(평성경), 후지와라쿄(등원경) 유적 등에서도 7세기께 관리들이 쓴 행정목간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이번에 함안산성에서 나온 문서목간처럼 시기를 앞에 적고 문구마다 ‘아뢰다’는 뜻의 ‘白(백)’자로 끝나는 형식을 공통적으로 갖고있어 신라 공문서 형식이 일본에 후대 전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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