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선생님 문하생 시절이었던 1989년. 은마아파트를 개조한 화실의 거실에서 마감에 여념이 없던 어느날. 창밖에 함박눈이 내리고 안방에서 작업하시던 선생님도 어쩐 일인지 거실로 화판을 들고 나와 함께 작업을 하셨다. 그 순간 카세트테이프를 데크에 넣고 플레이를 눌렀다. 겨울 오후 마감에 지친 한낮의 화실에 작은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칭찬에 인색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야, 기똥차다.”
그 음악은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 재즈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던 초기에 레코드점에 가서 재즈음악 입문용으로 추천해달래서 사온 테이프였다. 지금도 여전히 큰 눈송이가 내리면 그날의 포근했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께서 차에서 듣게 복사해달라고 하셨는데(그땐 복사해서 듣는 게 일상적이었다) 난 속으로 “하나 사시지”라는 생각에 아직도 안 해드렸다. 헤헤. 기분이 좋아지신 선생님은 당시 한창 유행하던 참새 시리즈 퀴즈를 하나 내셨고 우리는 무참히 한방에 맞혀버렸다. 뒤이어 하나 더 하셨는데 그 역시 한방에 맞히고…, 창밖은 아름답고 화실은 적막에 싸였었다.
눈이 쌓인 풍경을 바라보며 플레이 리스트에 1번으로 이 음악을 올려본다. 문하생 시절에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때도 있었다. 모든 식당이 문을 닫았는데, 어느 해인가, 단골 식당 아줌마가 밥통에 밥을 가득 해서 주셨다. 연휴 내내 먹으라면서. 고마운 분이셨는데 나중에 설렁탕에 분유를 탔던 게 탄로나서 그만, 화실의 단골 식당에서 제외되는 아픈 역사가 이어졌다.
두 번째 플레이 리스트는 만화다. 문하생 시절의 나처럼 고향길을 포기했거나 고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약간 넉넉해진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스러울 것이다. 어렸을 적엔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중국 무협 시리즈 비디오를 보면 연휴가 뚝딱 갔다. 극장 한 번 갔다 오면 친구들과 며칠은 떠들거리가 채워졌다. 지금은 어디 그런가. 볼 것, 들을 것투성이라 딱히 연휴가 아니어도 어마어마한 양의 문화 소비를 하고 있다. 명절 연휴에만 할 수 있는 것으로 밀린 장편 대작을 섭렵할 것을 추천한다. 나는 양영순 작가의 <덴마>를 추천한다. 어린이 몸속에 갇힌 우주택배 기사 덴마의 이야기인데, 복잡한 우주관과 등장인물이 얽혀서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을 때 본다면 그 맛이 두 배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 웹툰에서 수백편이 연재된 지금 겨우 프롤로그가 지났다 하니 가히 그 대작의 규모를 상상이나 하겠나. 이때를 놓치고 조금 더 훗날 도전을 꾀한다면 쌓인 연재분의 분량 앞에 당신은 무릎을 꿇을 것이다. 지금 시작하라.
윤태호/만화가(<미생> <내부자들> <이끼> <인천상륙작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