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여년간 인천 배다리 동네의 재개발 흐름에 맞서 지역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지키는 거점 공간으로 주목받았던 스페이스 빔 들머리. 최근 소유주가 스페이스 빔이 들어선 옛 양조장 건물의 매각 방침을 통보하면서 공간 운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대신 들어선 문화사랑방. 그곳에 가면 경인선 열차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채소가 자라는 텃밭을 거닐게 된다. 술 대신 미술, 건축, 공연, 퍼포먼스를 빚어온 옛 양조장 1, 2층 공간은 이런 풍경 끼고 주민, 예술인들이 어울리는 아지트가 되었다. 그러나 내년부터 이 오아시스 같은 공간을 더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인천 창영동 7번지, 배다리 헌책방 동네의 옛 양조장 건물에서 10년간 터 박고 활동해온 지역 문화예술공간 스페이스 빔이 위기를 맞았다. 세든 옛 양조장 건물 소유주가 최근 매각을 위해 더는 계약하지 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작가 출신으로 100여 차례 이상의 전시·공연 기획과 나눔가게, 생태마을 프로그램 등을 꾸려온 민운기 대표는 고민에 빠져 있다.
“소유주가 배다리 문화역사 경관을 지키려는 활동 취지에 호감을 가지셨죠. 10년간 임대료 올리지 않고 계약을 자동연장해왔어요. 지난달 찾아오셔서 올해 말까지인 계약을 더 연장하기 어렵겠다고 하시더군요. 올 게 왔구나 싶었어요. 이제 인천의 근대 산업유산인 옛 양조장 건물의 미래를 어떻게 가꿔야 할지 잘 살피고 잘 실천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현재 국내 지역미술계에서 가장 돋보이는 비주류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잡은 스페이스 빔은 2002년 인천 구월동에 처음 생겨났다가, 2007년 배다리 동네를 가르는 산업도로 계획에 맞서 여기로 자리를 옮겼다. 19세기 말 개항 이래 근대 생활사의 보고인 인천 역사공간을 주민과 함께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 대표는 예술인들과 손잡고 1, 2층의 양조공장 시설과 바로 옆 한옥 얼개를 살려 전시장, 교육실 등으로 직접 리모델링했다.
각종 실험적인 전시와 공연 이벤트가 가능한 1층 우각홀 내부. 옛 양조장 시절의 구호판과 사무실 구조가 보존돼 있다.
배다리는 유서 깊은 근대역사의 명소다. 개항 당시 바닷물이 들어오는 깊은 포구였는데, 여기 들어온 배들 위로 다리를 댔다고 해서 지어진 지명이다. 경인선의 첫 터파기 공사가 시작된 곳이고, 헌책방 골목과 근대기 선구적 교육기관이었던 창영초교, 조흥상회 같은 근대 상업건물 등이 밀집해 있다. 스페이스 빔 터전인 옛 양조장 건물도 1927년부터 96년까지 인천을 대표하는 술 브랜드였던 소성 막걸리를 빚어왔던 시설이다.
이런 내력을 잘 아는 주민들은 스페이스 빔의 민 대표와 합심해 10년 전 동네를 두 동강 내는 산업도로 개설을 막았다. 이런 성과에 대한 자부심을 공유하면서 지역 문화공간 가운데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공동체 문화의 열매를 거두어왔다.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맞닿은 각종 문화생태 교육 프로그램, 건축인·미술인·연극인들과 함께 기획하는 지역예술 행사 등을 지속하면서 다른 지역 예술인과 문화 담당 공무원들이 줄줄이 보러 오는 명소가 됐다.
양조장을 리모델링한 스페이스 빔 1층 우각홀 공간의 일부. 옛 생활한옥의 기와 처마가 전시장 공간 안으로 튀어나온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민간 개발업체 손에 넘어가 철거되고 말쑥한 도시생활형 주택 등이 들어서는 게 가장 나쁜 미래지요. 터의 공시지가가 10억여원인데, 그보다 높은 값에 건물을 사들일 자체 여력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건물 공간을 잘 보존하면서 지역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살릴 매입자를 찾아 소개하고 바람직한 운영 대안도 계속 제시할 생각이에요.”
민 대표는 나름의 대비책을 털어놨지만, 전망이 녹록지는 않다. 관할 동구청(구청장 이흥수)과 건물의 장래 활용을 놓고 갈등이 빚어질 조짐이 보인다. 구청 쪽은 지난해 ‘배다리 근대역사문화마을 조성 계획’을 세워 양조장 건물을 매입해 활용하는 스토리텔링 사업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사업 성격을 놓고 주민들과의 이견이 크다.
스페이스 빔은 배다리 지역의 문화사랑방이자 인천 문화예술인들의 담론마당 구실을 해왔다. 2014년 스페이스 빔 공간에서 열린 인천 도시 상상·혁신 바자회 토론회 모습.
이달 초 구청 관계자들은 소유주와 만나 건물 매입 논의를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주민과 예술인들은 이런 행보에, 관광 공간 만들기 사업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비치고 있다. 민 대표는 “구청의 계획이 지난해 문화영향평가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고, 그간 문화마을 사업도 외부 관광객들만 의식한 보여주기 전략에 치중해 불신을 낳았다”며 “구청이 인수하면 박제화한 공간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도 했다.
민 대표와 주민들은 지난 2월 역사문화마을위원회를 꾸렸다. 문화유산국민신탁,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민간 공익재단 쪽의 옛 양조장 매입과 지속적인 관리 활용 등 스스로 원하는 보존 대안을 논의 중이며, 전문가들과의 대화도 시작됐다고 한다. 근대 흔적을 지키려는 의지와 주택, 관광을 내세운 재개발 욕망 사이에서 배다리골 사람들이 어떻게 활로를 틀지 지켜볼 일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스페이스 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