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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상생과 소통의 기운 뿌리내린 로고스의 땅

등록 2017-08-03 17:05수정 2017-08-03 21:19

인류문명의 뿌리, 아나톨리아(2)-베르가마와 에페스

에게해 고대도시들은 인문학이 처음 뿌리내린 곳
헬레니즘 문화 꽃피운 베르가마의 아크로폴리스와 신전들
실크로드교류사 흔적 생생히 담은 에페스박물관의 유물들
전란 딛고 풍성한 교역 바탕으로 철학, 역사, 미술 등 인문학 태동
1800여년 허물지 않고 여러 종교 성전으로 쓰인 공회당도 눈길
터키 베르가마 유적 들머리에 있는 크즐 아블루(붉은 성소). 2세기부터 로마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사원과 기독교 성당, 이슬람 사원으로 번갈아 쓰여온 종교 간 공생의 산증인 같은 건물이다. 최근 건물 앞에 이집트 신상 등을 세우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터키 베르가마 유적 들머리에 있는 크즐 아블루(붉은 성소). 2세기부터 로마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사원과 기독교 성당, 이슬람 사원으로 번갈아 쓰여온 종교 간 공생의 산증인 같은 건물이다. 최근 건물 앞에 이집트 신상 등을 세우면서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초승달과 별이 그려진 터키 국기(아이이을드즈: 월성기)의 바탕색은 빨강이다. 유목민과 정착민, 제국과 도시들 사이 전쟁으로 유혈이 낭자했던 아나톨리아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갈피를 뒤척거리면, 이는 일면일 뿐이다. 전란은 고원대지에 여러 문화의 흐름들을 융합시켰고, 공생과 소통의 정신이 공동체를 지속시킨다는 진리를 일깨웠다. 인문학의 발흥, 고대 그리스 신앙과 기독교, 이슬람 종교가 함께 숙성된 공생의 터전이 피어난 것은 필연적이었다.

한국 답사단이 지난 18~19일 두번째 답사 여정으로 찾은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해안의 두 고대도시 베르가마(페르가몬)와 에페스(에페수스)는 철학과 역사, 미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주요 개념들이 싹텄던 땅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유적지가 된 이 도시들은 개방과 관용, 교류의 미덕이 인류사에 얼마나 지대한 성취를 남겼는지를 보여주는 전범이기도 하다.

셀주크 시내의 에페스박물관에 전시중인 2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프리아포스 신상. 곧추세운 남근 위에 풍성한 자연물을 가득 얹은 이 신상은 당대 사람들에게 풍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셀주크 시내의 에페스박물관에 전시중인 2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프리아포스 신상. 곧추세운 남근 위에 풍성한 자연물을 가득 얹은 이 신상은 당대 사람들에게 풍요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18일 헬레니즘의 광채가 절정을 이루었던 베르가마 도시유적을 먼저 방문했다. 들머리에 있는 ‘크즐 아블루’(붉은 성소)의 복원 현장에서 지역 특유의 개방성과 관용의 역사를 실감할 수 있었다. 붉은 벽돌로 아치를 쌓아 올리며 지은 이 육중한 건물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3개의 종교가 번갈아 거쳐갔다. 2세기 로마시대에 이집트 신상을 받드는 사원으로 지어졌다가 이후 기독교가 국교화하면서 중세 비잔틴시대까지 성당으로, 오스만 제국령이 된 뒤로는 1950년대까지 무슬림 회당으로 쓰였다. 지붕이 날아간 것 외엔 1800여년간 건축적 뼈대가 온전하게 활용되었다. 시루떡처럼 종교 문명이 겹쳐진 채 1800년이나 버텨온 이 성소를 이교도들은 막 허물지 않았다. 주정부 쪽은 유럽 쪽 전문가들과 함께 최근 수년간 건물의 보수 복원 작업을 벌여왔고, 이집트 여신 세크메트신상 등을 건물 앞에 복원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닐귄 우스투라 베르가마 박물관장은 “1000년 이상 지속된 종교 간 공존을 보여주는 드문 기념물”이라며 “지난해 유럽연합으로부터 가장 뛰어난 복원 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에페스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상. 4세기 만든 것이다.
에페스 고대 유적에서 출토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상. 4세기 만든 것이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를 본떠 수백미터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기원전 1세기께 페르가몬 유적들도 전란을 딛고 일어선 상생의 터전이란 친연성이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 영웅 아킬레스의 아들이 아버지가 죽인 트로이 영웅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를 전리품으로 취하면서 낳은 아들 페르가모스가 만든 도시국가가 바로 이곳이다. 원수 집안의 결합을 통해 트로이의 번영은 터를 옮겨 이어진 셈일까.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실크로드 교역의 주요 거점이 되면서 이 언덕 위의 도시는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유행의 본산이 된다. 아테네보다 더욱 장대한 신전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필적한 페르가몬 도서관이 지어졌다. 양피지 책을 통해 오늘날 쪽을 넘기는 책의 원형도 여기서 태어났다.

2~3세기 로마 제2 도시로 번성했고 사도 바울이 전도에 애착을 쏟은 에페스는 최근 기독교 유적 복원 작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2000년 전 가로를 거니는 듯한 착각에 빠지는 도시유적 산책 못지않게 인근 에페스박물관에는 실크로드 교류사의 알짬을 담은 유물들이 넘쳤다. 지역 특유의 열렬한 지모신앙과 그리스신화의 여신이 결합한 20여개의 달걀 가슴이 주렁주렁 달린 아르테미스신상이 압권이다. 431년 에페스 기독교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 신격화를 결정한 지리역사적 배경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란 억측도 스쳐간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의 사실적 두상들은 세상만사의 보편적 원리인 아르케, 로고스를 찾는 철학의 태동지가 이곳(이오니아) 일대였다는 것도 상기시켜준다. 고고학자인 강인욱 경희대 교수는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나 한국의 비파형 동검보다 시기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17~18세기의 동검, 황금공예품 등을 보며 여기가 북방과 동방을 로마와 잇는 실크로드 길목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떠나는 길에 만난 아르테미스 신전터는 감흥을 갈무리하는 덤이었다. 중세 셀주크 시대의 성벽과 무슬림 모스크가 말년 성모마리아를 모시고 수행했다는 성 요한의 교회당, 아르테미스 신전의 거대한 기둥 하나와 겹쳐서 펼쳐지는 진풍경은 이 땅에 서린 관용의 역사를 웅변하는 듯했다.

베르가마·에페스/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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