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촉수’를 더듬으며-혁명과 웃음, 르네상스인 김승옥
시사만화가이자 소설가 사회현실 문제에도 적극 참여
‘혁명과 웃음’ ‘르레상스인 김승옥’ 김승옥의 면모 재조명
‘만화가 김승옥’을 아시나요?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과 같은 빼어난 단편소설들로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소설가 김승옥(64)의 출발은 문학이 아닌 만화였다. 그것도 일간 신문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
김승옥은 서울대 불문과 1학년이던 1960년 9월 1일부터 신생 <서울경제신문>에 ‘파고다 영감’이라는 제목의 네 칸짜리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방 출신 고학생의 학비 벌이의 일환이었지만, 이 장래의 소설가가 글 쓰는 재주 못지않게 그림 그리는 솜씨 또한 출중했다는 증거일 테다(그는 나중에 동인지 <산문시대>에 문우들의 캐리커처를 그렸으며 여러 단행본 표지 그림과 장정을 맡았고 자신의 연재소설에 직접 삽화를 그리기까지 했다). 단순히 그림 그리는 재주뿐만 아니라 세상사를 ‘삐딱하게’ 관찰하고 그에 대해 논평하는 능력 역시 요구되는 게 시사만화의 세계다. 감각적 문체에 다소 허무주의적인 세계관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소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측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김승옥은 다름 아닌 4·19 세대 작가였다. 숱한 또래 문인들 중에서도 그는 4월 19일과 25일의 결정적인 시위에 모두 참여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시사만화가에게 요구되는 현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파고다 영감’은 1961년 2월 14일까지 모두 134회에 걸쳐 신문에 실렸다. 만화 작가로서 김승옥은 본명 대신 ‘김이구’라는 필명을 썼다. 순천 고향 집 번지수에서 가져 온 이름이었다. 김승옥이 시사만화를 그린 시기는 4·19의 열기가 어느덧 사그라들던 ‘혁명의 가을과 겨울’이었다. 그 겨울이 지난 뒤 혁명은 5·16 쿠데타라는 반동의 역습을 받았으며, 김승옥은 학교로 돌아가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만들고 소설 <생명연습>을 써서 신춘문예를 통과했다.
‘파고다 영감’의 주인공은 콧수염을 기르고 살짝 벗겨진 머리 위에 중절모를 썼으며 반바지를 즐겨 입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중년 남성이다. 깜짝 놀라면 머리 위로 솟아오르는 모자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김승옥의 만화는 혁명에서 쿠데타로 넘어가는 시기의 혼란과 모색, 일상과 역사를 두루 포착한다. 혁명이 있던 해 9월에 서울대 학생들이 중심이 돼 펼친 ‘신생활국민계몽운동대’ 활동에 대한 시민들의 냉소, 미국인에게 굳이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확인받고서야 비로소 과자를 받는 거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형편인데 또 다시 내핍생활을 해야겠다는 여론에 착안한 위 축소 수술 전문 병원….
소장 국문학자 천정환·김건우·이정숙씨가 함께 쓴 <혁명과 웃음>(앨피)은 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 영감’을 통해서 혁명의 가을을 되돌아본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르네상스인 김승옥>(백문임·송태욱·송은영·이정숙·조현일·조성진·한영주 지음)은 미학적 단편소설과 시사만화, 대중적 장편소설과 영화 시나리오 등을 두루 섭렵한 ‘전방위적 예술인’으로서 김승옥의 면모를 재조명한 논문 모음이다. 책 말미에는 2003년에 닥친 뇌경색의 여파로 언어 능력을 대거 상실한 김승옥을 어렵게 인터뷰한 글이 곁들여졌다. 또 책 머리에는 서울 문리대 시절부터의 친구인 시인 김지하씨가 동무의 건투 및 건필을 빌며 쓴 ‘승옥이는 반드시 다시 쓴다’는 편지글이 얹혀졌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앨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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