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호 건물 터의 화장실 유적에서 확인된 타원형 모양의 돌판 변기. 오물 구멍이 뚫려 있다. 옆에는 오물을 흘려보내는 경사형 배수로가 보인다.
1300년 신라 왕족들이 궁궐에서 썼던 변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실제로 보니 오늘날 변기와 다를 바 없었다. 사면 모서리가 뭉툭해진 타원형 화강암 덩어리 위쪽에 작은 구멍이 뚫린 돌변기, 쪼그려 앉는 발판을 각각 돋을새김한 돌판 두쪽으로 구멍 모양을 맞춘 결합식 변기가 가을 햇살 아래 드러났다. 변기 옆엔 정교하게 튼 오물 배수로와 전돌을 깐 바닥 등도 나타났다. 옛적 신라 궁궐 화장실의 단면을 훔쳐보는 듯했다.
26일 낮 경주시 인왕동 옛 신라 연못 월지(안압지) 근처의 발굴 현장. 2007년부터 이곳을 조사해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8~10세기 통일신라 도읍 경주의 왕족들이 썼던 수세식 화장실 터 등 최근 발굴 성과를 이날 언론에 내보였다.
양옆으로 동해남부선 철로와 원화로 차도가 지나가는 발굴 현장은 6280㎡에 이른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을 토대로 왕태자의 거처인 동궁 터로 지목해온 곳이다. 펜스 친 현장으로 들어가면 변기가 있는 화장실 터와 정교한 기단을 놓은 동쪽 출입문 터, 큰 강돌로 초석을 줄지어 쌓은 대형창고 추정 터, 깊이가 7m를 넘는 우물 등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가장 큰 관심이 쏠린 유적은 남쪽 깊숙한 지점(29호 건물 터)에 있는 화장실 터. 7.4평 넓이의 건물 터 공간과 그 안에 변기, 오물 배수시설이 함께 갖춰진 얼개가 고스란히 보인다. 고대 화장실 공간의 전모가 드러난 건 국내 발굴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초석이 놓인 건물 터는 배수로 위에 변기가 놓인 구역과 배수로, 전돌만 깔린 구역으로 나뉜다. 변기 구역엔 화강암 변기 돌판이 있고, 그 아래로 배출된 오물이 흘러가도록 경사면으로 다듬어진 암거(暗渠: 땅 밑에 고랑을 파 물을 빼는 시설)의 물길도 눈에 띄었다. 쪼그려 앉는 발판(판석)이 각각 있는 2개의 돌판을 맞물린 결합식 변기와 1개 돌판에 구멍을 뚫은 단독 변기석조물이 따로 출토된 채 놓여 눈길을 끌었다. 이종훈 소장은 “발굴 당시 결합식 변기는 원래 붙어 있던 2개 돌판이 따로 떨어진 채 후대 설치된 단독 변기 위에 놓여 있었다”고 전했다. 본래 기능을 잃고 나중에 따로 분리돼 발판 용도로만 재활용됐을 것이란 추정이다.
발판이 각각 돋을새김된 돌판 2개를 맞붙여 오물 구멍을 낸 결합식 변기. 후대에는 제 기능을 잃고 발판으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소 쪽은 추정했다.
더욱 흥미로운 건 변기 구역과 한 건물 안에 있지만 그 옆에 따로 붙은 배수로, 전돌이 깔린 구역의 정체다. 이 구역에는 바닥 수로를 2개의 돌판으로 가로막은 흔적이 보여 조사단 안에서도 소변실의 자취란 설과 용변을 보고 나서 손을 씻는 등의 전실로 쓴 것이란 설이 엇갈린다.
연구소 쪽은 격식을 갖춘 신라 궁궐의 고급 화장실이 분명하다고 단정했다. 변기에 물을 흘리는 수세식 설비를 통해 오물이 암거를 통해 배출되었던 얼개가 확연하다는 것이다. 물을 유입하는 설비가 따로 없어 항아리 등에서 물을 떠서 씻어 내리는 방식을 썼을 것으로 본다. 배수시설 주변 바닥에는 타일처럼 쪼갠 전돌을 깐 흔적도 확인된다. 박 연구관은 “현재 조사된 고대 화장실들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유형”이라며 “신라 왕실 화장실 문화의 면모를 가늠해볼 수 있어 생활사적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국내 고대 화장실 유적은 백제, 신라 유적에서 종종 발견된다. 경주 불국사에서 1970년대 변기형 석조물이 수습됐고, 2000년대 초엔 익산 왕궁리 백제궁 추정 유적에서 뒤처리용 나무 막대와 함께 저수조식 공동화장실 터가 발굴된 바 있다. 그러나 발판과 변기, 배수시설 등이 함께 붙은 고대 화장실의 전모가 드러난 것은 국내 첫 사례이며, 중국·일본 유적 등에서도 전례가 거의 없다.
3호 우물 터에서 나온 성인과 소아의 인골. 10~11세기 고려시대 우물이 폐기되고 난 뒤 그 위에 묻힌 것으로 왜 이들이 묻혔는지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현장에는 특기할 만한 다른 유적, 유물도 수두룩하다. 동궁 터 동문으로 추정되는 기단 건물 터, 창고 터, 우물 등이 확인됐고, 인골, 동물뼈 등의 생활유물들도 출토됐다. 우물의 경우 통일신라 말기 새끼사슴을 제물로 넣고 의례를 한 뒤 구덩이 일부를 폐기한 흔적이 나왔는데, 고려시대 그 위에 다시 성인 2명과 아이 2명의 인골이 묻힌 것으로 드러났다. 왜 이들이 다시 묻혔는지는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연구소 쪽은 성인 인골 용모를 첨단기법으로 복원할 방침이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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