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항 서북쪽에 자리잡은 옥문관의 입구. 옛 원형을 살리기 위해 후대에 세운 사립문 안으로 사각형 석탑 모양의 옥문관이 보인다. 입구에서 말몰이꾼들이 관광객들에게 기념촬영을 권하기도 한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7> 오아시스 북도의 관문 옥문관
둔황을 오아시스 육로의 인후(목구멍)라고 하면, 서역행 길목을 지키는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은 마치 인후에서 갈라지는 식도와 기도의 여닫이 같은 곳이다. 이를테면, 옥문관은 투루판을 지나 톈산산맥을 따라 중앙아시아로 뻗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쪽 관문이고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 언저리에서 쿤룬산맥을 따라 인도 방면으로 이어지는 남도쪽 관문이다. 우리 답사길은 북도를 따르는 길이므로 옥문관은 첫 관문인 셈이다. 막고굴을 둘러본 뒤 둔황에서 서북쪽으로 90㎞ 떨어진 옥문관으로 직행했다. 반쯤만 포장되고 나머지는 모래, 자갈이 섞인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이어서 1시간 반이나 걸렸다. 길가에 앙상하게 가시 돋친 낙타풀만 눈에 띈다. ‘옥문관 관리소’란 팻말 붙은 허름한 흙벽돌집 앞에 차가 멎자, 말몰이꾼 네댓명이 몰려와 저마다 자기 말 타고 유적지까지 가라고 법석인다. 원래 유적지는 밟아보는 데 묘미가 있는 터라 ‘말타고 꽃구경’할 수는 없었다. 우리네 혜초 스님도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이 문을 거쳐 갔을 것이다 관리소 맞은편에 20평 남짓한 ‘옥문관 박물관’이 있다. 옥문관 인근에서 발견된 죽간(글씨를 쓴 대나무 조각), 비단, 마지, 나무빗 등 유물들을 볼 수 있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옥문관 터임을 입증하는 몇몇 죽간이다. 통관증에 해당하는 ‘과소부’(過所符)라고 쓴 죽간이 이채롭다. 박물관을 나온 우리는 사립문 비슷한 문을 열어젖히고 800미터쯤 걸어갔다. 지금 남은 관문의 크기는 동서 24m, 남북 26m, 높이 9.7m로 부지면적은 약 630㎡다. 역대 장성의 관문치고는 작은 편이다. 그래서 ‘소방반성’(小方盤城), 즉 네모난 작은 성문이란 속명을 붙였다. 북면과 서면에 문이 하나씩 나 있다. 북문은 서북쪽으로 가는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로, 서문은 서남쪽으로 뻗은 남도로 출발하는 문이다.
옥문관의 전경. 원래는 좌우로 장성과 연결돼 있었으나 모두 파괴되고 지금은 울타리가 쳐져 있다.
더욱이 옥문관을 지나면 ‘악마의 늪’이라는 죽음의 사막 ‘백룡퇴(白龍堆)’가 펼쳐졌다. 400년 인도를 향해 떠난 동진의 고승 법현은 이곳을 지나면서 느낀 바를 〈불국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새도, 달리는 짐승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 수 없고, 오직 언제 죽었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표지가 되어준다.” 이 백룡퇴가 얼마나 험악한 곳이었으면 우리 판소리의 ‘열녀춘향수절가’ 중에도 이런 대목이 나올까. 그네를 뛰며 노니는 춘향을 보고 이도령은 마음이 울적하고 정신이 아찔해 “단봉궐 하직하고 백룡퇴 간 연후에 독류청총하였으니 왕소군도 올 리 없고…”라고 중얼거린다. 뜻인즉, 중국 전한 때 궁궐을 하직하고 흉노 선우에게 시집간 효원제의 궁녀 왕소군이 외로운 무덤일 수밖에 없는 백룡퇴로 갔으니 돌아올 리 만무한데, 어디서 그녀 같은 절색이 나타났을까라고 춘향의 미색에 놀란다. 아무튼 선현들은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악마의 늪’에서 서역 개통이라는 월척을 낚았던 것이다. 그들 가운데 우리네 혜초 스님도 들어 있다.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를 따라 귀로에 오른 스님은 분명 백룡퇴에서 살아남아 옥문관을 거쳐 둔황에 들렀다가 장안으로 발길을 옮겼을 것이다. 그 모습이 지금 막 저 사막 지평선에서 사라져가는 신기루처럼 아련하다.
옥문관에서 둔황 시내 쪽으로 오는 길목에 보이는 봉화대. 원형은 많이 허물어져 있지만 뒤쪽 밍사산 자락의 모래 물결과 함께 실크로드의 화려했던 한 시절을 엿보게 한다.(왼쪽 사진) 옥문관 앞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말몰이꾼 중에는 여성들도 있다.
사방에 울타리를 쳐 관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지형을 좀 살피고 싶어 얼마 떨어진 언덕 위에 서서 사방을 조망했다. 우선 서북쪽으로 5㎞쯤 떨어진 당곡수에 있는 한대 장성이 한눈에 안겨온다. 보통 장성 관문은 성곽에 붙어 있는데, 이 옥문관만은 성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진실성이 의심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지형상 부득이했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 ‘한장성(漢長城)’은 2100여 년 전인 기원전 2세기 초 축조한 것으로서 명대에 산해관에서 가욕관까지 개축된 만리장성보다 무려 1500년 앞서 지은 것이다. 그래서 이 한장성이야말로 만리장성의 원형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진대에는 장성, 한대에는 새원(塞垣), 명대에는 변장(邊墻) 등으로 다르게 불렸거니와 그 축조방법도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둔황 동쪽 안서로부터 서쪽의 로프노르(뤄부포) 호수 부근까지 150여 ㎞에 이르는 ‘둔황장성’은, 당시 서호 일대에 무성한 각종 수초와 모래자갈을 1:4 비율로 엇바꾸어 가면서 쌓는 방법을 썼다. 이 한장성의 기단 너비는 3m, 높이는 2.6m나 된다. 아직도 2천년 넘긴 유적답지 않게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나오는 죽음의 늪 옥문관 주위로 눈길을 돌리니 걸리는 것은 온통 봉화대뿐이다. 80여 개의 크고 작은 봉화대가 관문을 에워싸고 서 있다. 봉화대 가까이에는 예외없이 움푹 파인 곳이 드러나는데, 봉화용 나무를 수북이 쌓아뒀던 곳이라고 한다. 중국의 전쟁사를 살펴보면 봉화제도가 대단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봉화는 규모에 따라 가장 큰 것은 장(障), 다음은 정(亭), 수(燧) 순이고 가장 작은 것은 봉(烽)이라 한다. 그리고 적정에 따라 봉화용 나무 규모도 달랐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죽간 기록에 의하면 적이 50~500명일 때는 나무 한 섶을, 500~1000명일 때는 두 섶을, 3000명 이상일 때는 3~4섶을, 만명 이상일 때는 5섶을 태우기로 되어 있었다. 만리장성의 서쪽 끄트머리인 한장성 너머에는 로프노르호로 흘러들어가는 소륵하(疏勒河)가 흰 실오리처럼 늘어서 있다. 20년 전만 해도 물이 차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고갈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강바닥에 앙금으로 남은 염분이 햇빛에 반사되어 희게 보인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옥문관 땅도 마찬가지다. 이곳도 소륵하 지류에 의해 형성된 소택지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말라버려 희끄무레한 소금기만 번뜩인다.
살아남은 자만이 지날 수 있는 서역개통의 문-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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